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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new  l 

  • Apr 27, 2015
  • 24

캘리그라피~ 그거 멋있던데~

나도 한 번 써보려는데~

 

job_hunting_story-9

 

여기서 문제. 

아마도 여러분의 첫 고민. 

 

캘리그라피, 무엇으로 쓰죠?

 

① 펜 (딥펜,만년필,마커 등)

② 붓펜

③ 납작한 펜

④ 붓

 

정답은..?

 

 

네, 정답은 모두 다 딩동댕~♪ 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른 글씨를 좋아할 거 거든요.

 

여러분 모두 

다른 글씨를 쓸 거 거든요.

 

 

DSCF2465.JPG

 

▲ 이렇게 일정한 굵기, 혹은 굵기 차이가 크지 않은 단정한 글씨가 예뻐 보인다면 1번, ''종류를 고르세요.

 

딥펜이나 만년필은 굵기가 다소 조절이 되지만 잉크를 사용하는 측면에서 펜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 딥펜 : 피자를 디핑 소스에 찍어먹는 것처럼(!)

  잉크를 찍어 쓰는 펜을 말합니다.

 

DSCF2262.JPG

 

* 만년필 : 잉크가 들어있어 잉크를 찍지 않고 쓰는 펜이에요.

 

 

h3.JPG

 

▲ 이렇게 굵었다 얇았다하며 선들이 물결치는 글씨가 쓰고 싶다면 2번, '붓펜'을 고르면 됩니다.

 

DSCF2429.JPG

 

▲ 이렇게 한쪽 방향은 굵고 다른쪽 방향은 얇은,

굵었다 얇았다 하는 와중에도 정리가 되어 보이는 글씨가 멋져보인다면 3번, '납작한 펜'으로 시작하고요~

 

 

올빼미_final.JPG

 

검은 글씨는 다 멋있다거나

저기 저 진하고 흐린 것 정말 좋다거나

엄청나게 굵었다가 엄청나게 얇았다가 하는 저 멋진 선들이 탐난다거나

영화 포스터에서 본 그거 나도 써보고 싶다거나

 

하면 4번 ''을 골라 잡으면 됩니다.

 

 

살짝 다른 표현에서 눈치채셨겠지만,

굵기와 진하기, 그리고 크기와 선의 느낌, 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가장 표현이 다양한 것은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린 '붓' 이랍니다. 

 

모두 다 정답, 이라고 했는데

붓이 가장 좋아요, 라고 하는 것 같다구요?

 

sally_special-2

 

 

네, 나중에는 여러분 모두 각자 다른 도구로 다양한 글씨를 쓰게 되겠지만,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기 좋은 도구는 가장 많은 표현이 가능한 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붓으로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기에는 공간이나 휴대성면에서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 부담스러운 부분은 적으면서 펜이나 납작한 펜에 비해 다소나마 표현이 다양할 수 있는 '붓펜'으로 시작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DSCF2466.JPG

 

붓펜 중에서도 굵기와 선처리를 보았을 때 毛 재질의 붓펜이 더 많은 표현을 할 수 있으므로, 시작하는 여러분께는 표현방법을 늘리는 차원에서 모 재질의 붓펜을 추천합니다. (쿠레다케나 펜텔 등)

 

모 재질의 붓펜은 끝이 섬세해서 처음엔 쓰기 어렵지만, 손에 익으면 다른 도구들은 쉽게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답니다~

 

 

다들 추천하는 도구로 끝나는 결론이 허무했나요^^

 

그렇더라도 도구를 선택하는 기준과 과정을 찬찬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나중에는 어떤 도구로든 자기만의 글씨를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무엇으로 쓸까' 편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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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붓펜 들고 만나요!

 

* 포스트를 보고 궁금한 점이나 의견은 메일/쪽지/덧글로 전해 주시고요, '다음엔 이것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세요' 라는 의견도 환영합니다 :)

 

고맙습니다.

 

◆◆

재주손이. 순 드림

 

http://handylady.blog.me

http://instagram.com/handylady

 

 
 
 
 
 
 
 
 
 
 
 
 
 
 
 
  • Mar 12, 2015
  • 62


"당신이 6개월 혹은 1년 동안 매일 1시간씩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수백 시간 혹은 수십 시간 연습하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온전히 그려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품에 수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능력 또한 갖출 수 있다. 나는 이 점을 보장하는 바이다. 잠시라도 시간이 허락된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자." 

-<존 러스킨의 드로잉> 중 


드로잉, 예술가들을 가로질러 '나'에게 오다.

나의 책 <오늘의 일러스트>는 한국의 미술가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45명의 한국의 미술가들을 인터뷰하면서 발견한 의외의 사실은 이들 중 그림을 뒤늦게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행의 풍경을 감각적인 드로잉으로 기록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오기사'는 원래 직업이 건축가다. 본명보다 그를 더 잘 수식하는 오기사의 '기사'는 바로 건축 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역시 대기업을 다니던 잘 나가는 회사원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우연히 시작한 드로잉이 그를 한국의 대표하는 드로잉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오기사 '날씨를 이해해주는 마음' /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차이니즈 봉봉 클럽>으로 열혈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만화가 조경규 역시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군가 부탁한 만화를 그리기 전까지는 그래픽 아티스트였음을 말이다. 그림에 잼병인 내가 미술가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그림을 그릴 수 있냐"라고 경탄을 표시할 때마다, 번번이 미술가들은 "당신도 할 수 있다"라고 다독여주곤 했는데 솔직히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 깊은 마음속에는 그림은 '타고난 천재'만의 영역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작가이자 화가였으며, 사회 개혁 사상가이도 했던 존 러스킨의 뜻밖의 책, <존 러스킨의 드로잉>이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개혁 사상가답게 그는 '드로잉'을 일컬어 사물에 대한 관찰과 사유의 밀도를 높이는 유용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로 일반인들도 적극적으로 배울 것을 권장하고, 장인 학교에 소묘 강좌를 개설하고 수년 동안 강의를 했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다.


'드로잉, 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드로잉을 시작해야 할까? 아니, 왜 사람들은 드로잉을 하고 싶은 걸까? 



왜 드로잉을 하고 싶을까? 

일러스트레이터, 페인터, 만화가 등 미술가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웹툰'을 그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 해에만 10만 명이라고 한다. 출판 불황 시대에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기 책'이다. 놀라울 정도로 그림과 관련된 드로잉 북, 스케치북, 색칠 책이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그리기'의 욕망은 절실하다. 학교 선생님인데도 만화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따로 시간을 내어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에게 "두 가지 일을 하기란 참 힘든 것인데, 왜 그리냐"라며 우문을 던졌는데 이유는 흔들림없이 단호했다.

"제 직업은 만화가니까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어쩌면 그 꿈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표현 욕구'가 우리 삶에서 과연 제대로 표출되고 있을까. 드로잉은 억압된 욕구의 해방구일 수도 있고, 존 러스킨의 조언처럼 관찰력과 사유 능력을 길러주는 훌륭한 도구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손끝으로 행하는 인간의 미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이 중 무엇이 되었든, 자본과 매개되는 행위들만 의미있다고 평가되는 시대에, 드로잉이라는 미감의 영역으로 '자정 중'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새삼 위안이 된다.


드로잉,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드로잉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가야 한다면 주저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초보를 위한 친절하고 훌륭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다. 드로잉 관련 책을 서점에서 훑어보고, 그 중에서 자신의 취향과 수준에 가장 적합한 책을 찾아내, 일단 그 책 한권을 마스터해보는 것이 좋다.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 / 출처 : 네이버 책>


오은정이 엮은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은 굉장히 꼼꼼하고, 친절한 책이다. 어렵지는 않지만 어수룩하지도 않다. 상당한 내공을 쌓게 만드는 책이다. '그리지 않고도 그림 실력은 향상될 수 있다', '직선 긋는 방법', '진짜 관찰은 구조를 파악하는 것', '복잡한 물체는 패턴을 찾아라', 내가 어떤 성향인지를 파악하자', '이 책이 안내하는 수칙을 믿고 따라가본다면, 드로잉이라는 세계에 발을 내딛는 데 자신감을 심어줄 것이다. 


정진호가 자신의 글과 그림으로 엮은 <철들고 그림 그리다>는 그림을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벗이 돼줄 것이다. 그 역시 마흔이 된 어느 날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어 시작했는데,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로 시작되는 글은 기운을 복돋아주기에 충분하다. 그가 제시하는 '일상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행복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이다. 그가 안내하는 일상 예술가의 길을 차분하게 따라가다보면 일상도 보이고, 감춰져있던 예술가의 기질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행복과 마주하게 될 듯하다. 


<플레잉 위드 스케치 / 출처 : 네이버 책>


드로잉의 영역을 보다 넓혀 좀 더 다채롭게 접근할 수 있는 <플레잉 위드 스케치>는 마치 추억의 만들기 수업에 우리를 초대하는 듯한 책이다. 물론 초보에게는 어렵겠지만, 다른 드로잉 책을 통해 기초를 연마했다면, 과감하게 이러한 책에 도전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아트북에 관심있는 사람이었다면 꼭 기억해둘 것.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철학자였듯 드로잉 수업과 함께 스케치에 관한 글을 접하는 것도 그림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존 버거가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쓰고 그린 <벤투의 스케치북>을 리스트에 같이 올려보자. 보는 것이 그리는 것이며, 그리는 것이 곧 보는 것임을, 그리고 이러한 순환 행위를 통해 나의 삶에 자유와 여유가 찾아옴을 '덤'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 Feb 16, 2015
  • 44

책장 어딘가에 발 묶여있던 인물이 내 머리와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불과 석 달 전 일이다. 그전에도 그는 교과서, 시집,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 같은 곳에 빈번히 등장했기에 낯선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마음 한편이 불편한 탓에, 채널을 돌렸고 시도 대충 훑어 보고 말았다. 그를 브라운관 안에, 책 속에 가둬놓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방적인 외면 때문에 생긴 무거운 감정을 조금 덜어보려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가 고민했던 세상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하는 바람도 있다. 내가 가진 가장 흔한 물건이자 누군가는 애타게 바랐을 물건으로, 조심스레 이야기를 담아본다.

그는 만주에서 태어난 ‘윤동주’라는 청년이다.

연필을 들며

어떤 날의 별 이미지 1

몇 달 전 나는 헌 책을 파는 카페에서 구효서 작가의 『동주』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물이 가득 찬 방에서 몸을 맡긴 채 떠 있는 남자가 그려진 표지에 이끌려 그걸 덜컥 사버렸다. 만약 윤동주에 관한 소설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 조용히 책을 놓고 나왔을 것이다. 그는 나의 문학적 한계와 바닥난 애국심을 일깨워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읽은 책의 여파는 컸다. 교과서와 시집에서 본 그가 ‘시인’이었다면, 소설을 통해 본 그는 시를 쓰는 ‘청년’이었다. 그의 삶에서 시를 제외할 수 없었지만, 그 전에 그가 한낱 스물일곱이었단 사실도 눈감아 버릴 수 없던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를 상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흑백 무성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마치 색깔이나 목소리 같은 것을 잃은 듯했다. 어쩌면 빼앗겼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원고지나 연필 말고도 시인의 손 틈을 빠져나가는 것이 많아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윤동주에 관한 네 권의 책을 더 읽었다. 그리고 종국엔 그의 흔적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증발된 말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미국 등에서 다양한 언어를 유입하고, 일찍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을이기도 했다. 명동교회를 세운 김약연 목사의 조카였던 윤동주는 자연스레 기독교에 발을 들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성실한 종교생활을 했다.

그런 윤동주도 신앙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가 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기도해도 끝나지 않는 폭력의 시대에 절망하고 흔들렸다. 문우 문익환과 동생 윤일주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에게도 신앙의 회의기가 있었다. 연전 시대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존재를 깊이 뒤흔드는 신앙의 회의기에도 그의 마음은 겉으로 여전히 잔잔한 호수 같았다. "

문익환, [동주 형의 추억], [하늘과 바람과 별과 ], 216쪽

"동주형이 무릎을 꿇고서 예전과는 달리 꽤 서투른 기도를 드렸다. "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나라사랑] 23집, 외솔회, 1976

왼쪽 윤동주 오른쪽 정병욱

누구보다 종교와 가까웠던 사람이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까지, 마음 안에선 수많은 균열과 혼란이 교차하진 않았을까.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도, 혹은 익숙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를 이해하고, 상상할수록 궁금했다. 책과 기사를 게걸스럽게 수집하고, 읽었다. 논문이 삼백 편이 달할 정도로 많았는데, 그것들을 볼수록 왠지 ‘그’와 멀어지는 것 같았다. 방대한 활자들은 맞지 않은 옷이 되어 어떠한 불편함을 내게 안겼다. 글의 모습대로라면 윤동주는 저항적인 항일투사여야 했다. 하지만 시인의 가족, 친구, 심지어 그를 감시했던 일본 간수의 증언을 읽으면 ‘투사’라는 단어에 좀처럼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읽은 그는 승패를 겨루는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모두가 앞다퉈 조선과 일본의 편을 가를 때, 인간이 인간에게 칼을 겨눠야만 했던 시대를 슬퍼했던 사람이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지만, 그 한마디가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깊은 마음으로 세상을 앞서 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들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나를 이끌어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 그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가끔 입을 열면 고작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 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별 헤는 밤]을 완성한 다음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기념으로 출판을 계획했다. [서시]까지 붙여서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한 다음 그 한 부를 나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서시]가 완성되기 전) 처음에는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 외솔회, 1976

윤동주의 후배 정병욱의 증언이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주고 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관했다가 해방 뒤에 유족의 품으로 돌려주었다. 그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유일한 유작이다.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는 단조롭고 순수하다. 여성스러운 어조에 상냥함까지 느낀다. 그렇기에 누군가 투쟁을 대입시켜 본다면 퍽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그는 특정한 입장을 내세운 게 아니다. 그가 배웠던 여러 개의 언어 중,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건 조선어였을 뿐이고, 그가 쓴 시는 일기라고 할 만큼 일상이었을 뿐이다. 시인에게 있어 언어와 시의 존재는 어떤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윤동주를 기억하길 바란다. ‘민족 저항 시인’이 아닌, 누이나 강아지, 반딧불 같은 것을 노래했던 ‘평범한 청년’이 사라져야만 했던 안타까운 시대에 의미를 둔다면, 그의 시는 품이 잘 맞는 옷을 입게 되지 않을까. 굳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히려 들지 않아도, 때 묻은 무명옷을 입은 그를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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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와 윤동주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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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윤동주

우연히 지인과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까닭 모를 애잔함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는데, 공통적으로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가 노래했다면 유재하 같은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낡은 기타를 치며 누런 종이에 뭉툭한 연필로 가사를 적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수가 유재하뿐만은 아니었으니, 왜 하필 유재하였는지는 조금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노래를 찾아서 들었다. 플레이어에 처음 재생된 건, 그의 대표곡 ‘그대 내 품에’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갈증은 사라졌다. 정말 단순하게도, 첫 소절에 ‘별 헤는 밤’이라는 가사가 있어 자연스레 같은 제목인 그의 시를 떠올렸던 것이다. 유재하의 정직한 발음과 어딘가 불안한 음정은 윤동주의 단단하지만 기울어진 서체와 비슷했다. 사랑하는 이의 부제에 관한 감정을 요란스럽지 않게 고백하는 모습도 서로 닮아있었다.

유재하는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짧은 생은 우연하게도 윤동주와 평행했다. 교통사고, 식민통치라는 죽음의 배경이 그들의 유작을 더 애틋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과거에 그들이 했던 일들이 지금, 여기 방안까지 흘러와 내게 연필을 쥐여줬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더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든다. 그들이 남기고 간, 단 한 편의 시집과 한 장의 앨범이 어딘가에서 계속 펼쳐지고, 재생되고 있을 것이다.

유재하의 음악을 들으며 윤동주에 관한 기사를 쓴다. 밤하늘이라든가 별이나 꽃을 쓰고 부른다는 건 흔한 일이지만 유재하라서, 윤동주라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을 이해한 후에 작품을 마주하니 어쩐지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만 같다. 비록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라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결국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그 둘은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서 걸음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물때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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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에는 윤동주의 행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과거에 청운 수도가압장과 물탱크였던 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공공건축 국무총리상을 받아 공간 자체의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나는 그곳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주변을 곧잘 지나가기도 했는데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여느 기념관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물건들이 나열돼 있겠지, 예상만 했다. 그런데 취재를 핑계 삼아 방문한 문학관은 조금 달랐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보통의 기념관처럼 인물의 일대기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2, 3전시실은 글이 아닌 ‘공간’이 윤동주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곳은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이라는 명칭으로 나뉘어 있었다.

열린 우물 전시실은 1전시실과 3전시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면이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고 천장은 뻥 뚫렸다. 실내도 실외도 아닌,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벽면 한쪽에는 물이 고였던 흔적이 보였다. 고개를 들면 퍼런 하늘과 앙상한 나무의 가지가 조금 보였다. ‘이곳이 윤동주의 생의 일부분이라면 나는 어디쯤 왔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 뒤 유학 생활에 적응해 나가던 시기, 아직 완벽한 불행이 와 닿지 않은 시기 정도가 아닐까. 그저 보일 듯 말 듯한 나뭇가지를 보며 추측한 것이었다.

무거운 철제문을 밀고 들어서자 컴컴한 어둠이 쏟아졌다. 마지막 전시실이었던 그곳에서는 윤동주 관련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국가유공자 휘장을 단 할아버지와 일본인 관광객 두세 명, 그리고 내가 작은 의자에 앉자 영상은 시작됐다. 10여 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영상이 이어졌음에도 나는 쉽게 집중할 수 없었다. 한구석에서 내려오는 빛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개구부 밑에 사다리 모양으로 녹슨 철근의 흔적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시야에 계속 맴돌았다. 전시실을 나올 때까지 그 공간의 의미를 몰랐는데 문을 열고 햇빛과 마주하게 된 순간, 흐릿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윤동주가 간절히 원했던 건 한 줄기의 빛이었고, 그럼에도 그가 바라본 하늘이 대부분의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건물을 떠나기 전에 물때의 흔적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의 학적부를 생각했다. ‘윤동주’라는 이름 위에 그어졌던 ‘빨간 두 줄’, 그리고 그 옆에 쓰인 ‘히라누마 도오슈’라는 또 하나의 이름. 그 혼란의 흔적이 머릿속에 눌어붙은 스티커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연필을 놓으며

겨울이 지나가지도, 봄이 오지도 않은 애매한 계절에 서 있다. 윤동주 시인이 독립을 6개월 앞두고 운명한 시기와 비슷하다.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조선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끌려간 후쿠오카 형무소 안에서, 그는 그렇게 노래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 가까이로 떠났다. 애석하게도 일본에 있는 형무소 중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앞줄 좌측 윤영선, 송몽규, 김추형 / 뒷줄 좌측 윤길현, 윤동주

어떤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던 건, ‘사이의 섬’이라 불리는 간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염원과 현실의 괴리에서 비빌 곳 없이 덩그러니 서 있는 그를 그려본다. 윤동주의 당숙 윤영춘의 증언에는, 윤동주가 죽기 전에 무슨 뜻인지 모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는 일본 청년간수의 말이 보태져 있다. 미뤄 짐작해보건대 그의 마지막 외침은 조선어가 아니었을까. ‘일본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한계에 다다른 지통의 소리였을 지라도 마음 한편이 시큰한 건 마찬가지다. 무엇이었든 그가 뱉은 말 중에 아프지 않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도 이따금씩 희망을 얘기하던 그였다.

어떤 날 별은 위성처럼 또렷하고, 또 어떤 날엔 소등된 전구처럼 그 자취를 아예 감춰버리기도 한다. 이 글을 마치면 윤동주의 존재도 또다시 잊혀가거나 반짝 떠오를 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묻어두었던 석 달 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겠지만, 어쩐지 한층 안정된 기분이다. 별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저 하늘 위에서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의 시를 되새겨 보는 것, 그것이 그를 위한 최선의 위로라고 생각했다.

어떤 날의 별 이미지 2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 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2.7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437 용문중학교 미술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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