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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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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흥사터 출토품 복원해 공개
대궐·큰절 지붕 양 끝에 달았던 날개 모양의 장식기와
6세기께 가장 오래돼…우아한 곡선·화려한 꽃무늬 일품

 

왕흥사터 동승방터 남쪽에서 나온 치미. 우아한 곡선미와 수려한 장식문양 등에서 백제 특유의 조형미가 잘 드러난다.

[왕흥사터 동승방터 남쪽에서 나온 치미. 우아한 곡선미와 수려한 장식문양 등에서 백제 특유의 조형미가 잘 드러난다.]

 

왕흥사터 동승방터 남쪽에서 나온 백제 치미의 측면. 음각된 불꽃모양 장식선 사이에 정교한 백제스타일 연꽃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올려졌다.

]왕흥사터 동승방터 남쪽에서 나온 백제 치미의 측면. 음각된 불꽃모양 장식선 사이에 정교한 백제스타일 연꽃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올려졌다.]

 

 

백제시대 건축의 진수로 평가되는 6세기께의 지붕 장식기와 ‘치미’가 처음 세상에 나왔다. 3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이 치미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백제 고찰 왕흥사터를 2013~14년 발굴 조사한 결과 나온 것이다. 연구소 쪽은 당시 왕흥사의 승방으로 추정되는 동건물터 양끝에서 지붕에 올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를 각 1점씩 발굴수습한 뒤 이번에 복원해 공개하게 됐다.

 

왕흥사터 치미는 왕흥사지 창건 당시(577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있다. 부소산 폐사지 치미, 미륵사지 치미 등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 치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말기 사비도읍시대 기와 제작기술과 건축기술, 건축양식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름모꼴의 틀 안에 연꽃, 구름, 풀꽃 등의 무늬를 새겨 외면을 장식했고, 위로 치솟는 꼬리 부분을 날카롭게 표현하여 새가 꼬리를 세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연구소 쪽은 “단순할 수도 있는 지붕장식을 화려함과 위엄을 갖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최고 수준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왕흥사터는 2000년부터 15차례 학술발굴조사가 이뤄진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사찰 유적이다. 2007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보관용기인 사리장엄구와 일괄 공예품들(보물 1767호)이 나와 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치미는 3일 오후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6∼7세기 백제·신라 기와의 대외교류’학술대회에 일반공개된다. 이어 29일부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세계유산 백제’에도 출품되어 선보일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Sep 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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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희(가운데) 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대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조각보를 들어 보이며 보자기 작품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수원서 내달 5일까지 ‘국제보자기포럼’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로 통하는 피에트 몬드리안이 한국의 조각보를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청(靑)·적(赤)·황(黃)·백(白)·흑(黑) 등 오방색의 알록달록한 천 조각을 이어 붙인 조각보에서는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조형미가 넘친다.

“이름 없는 조선 시대의 여인들이 직접 천을 짜고 바느질을 해서 보자기를 만들었어요. 특히 조각보는 남은 헝겊 조각들로 만들어져 귀히 여겨지지 못했죠. 그런데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보자기를 보고 세계인들은 ‘헝겊과 공기로 만든 조각’이라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어요.”

국제보자기포럼 대표인 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대(RSID)의 이정희(71) 객원교수는 해외에서 ‘한국 보자기 대사’로 통한다. ‘2016 국제보자기포럼’ 준비로 바쁜 이 교수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작업실 겸 자택에서 25일 만났다.  

격년제로 열리는 국제보자기포럼은 2012년에는 파주 헤이리, 2014년에는 제주 저지예술인마을에서 개최됐다. 그리고 올해는 9월 1일부터 경기도와 수원시의 후원으로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 등지에서 5일까지 열린다.  

“보자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국내 연구자와 예술가는 물론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핀란드, 호주 등의 교수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이 교수는 RSID에서 1999년부터 무려 17년간 ‘보자기를 넘어(Bojagi & Beyond)’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또 영국과 호주, 캐나다 심지어 사막의 나라인 중동까지 찾아다니며 보자기 미학과 관련한 워크숍을 하고 있다.  

작품활동도 활발히 했다. 지난 2001년엔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서 두루마기 등 보자기로 만든 의상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고, 2007년에는 세계적 첼리스트 요요마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과 컬래버레이션 전시를 가져 주목을 받았다.
 

현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과 미국 뉴욕 공예박물관 등 세계 곳곳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보자기는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커요. ‘싼다’ ‘덮는다’라는 기능적 수단을 넘어 ‘섬유조각 미술’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건물 전체를 덮는 ‘퍼포먼스’로부터 지역 전체를 뒤덮는 ‘대지미술’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할 ‘문화 브랜드’로 키워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자기-살아있는 전통’이란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포럼에는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등 섬유공예 관련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저명한 15명의 강연과 해외 및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 150여 명의 작품이 수원시립아이파크 미술관 외에 수원화성박물관, 행궁길 갤러리, 복합문화공간 행궁재, 임아트 갤러리, 남문 로데오 갤러리 등 6곳의 뮤지엄에 전시된다. ‘보자기 만들기’를 비롯해 5개 전통문화체험 워크숍도 준비돼 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 May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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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하고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기상천외한 인물이었다. 장수하며 방대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이자 재능 넘치는 데생 화가이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정치인이자 만족할 줄 모르는 만인의 연인으로 ‘세기의 전설’이었다. 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으며 (…) 급작스럽게 정치적 성향을 바꾸면서도, 인도주의적인 자신의 신념만큼은 충실하게 지켰다. 정치적이기보다는 이상주의적이었던 그는 ‘권력가’라기보다는 자유와 정의를 섬기는 ‘사상가’였다.” 델핀 뒤샤르

출생과 성장, 그리고 명성

빅토르 위고 이미지 1

 

 빅토르 마리 위고는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군인으로 출세가도를 달려 장군까지 진급한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 훗날 부친의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빅토르는 시작에 몰두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불과 14세 때인 1816년 7월 10일자 일기에서 위고는 당대의 저명한 작가 겸 정치가 프랑수아 샤토브리앙을 의식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긴다. “샤토브리앙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

 

위고는 소꿉친구인 아델 푸셰와 결혼한 해에 낸 첫 시집 [오드](1822)로 주목을 받았고, 희곡 [크롬웰](1827)과 시집 [동방시집](1829)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트린 작품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당대에는 워낙 파격적이어서 상연이 불가능했지만, 그 희곡의 ‘서문’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위고는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희곡 [에르나니](1830)는 객석에서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가 저마다 야유와 박수를 보내는 대소동의 와중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은 소설가로서 위고의 명성을 확고히 해 주었다.

 

위고는 1830년대에 프랑스 문단에서 낭만주의의 선도자로 명성을 떨쳤다. 1835년의 초상화.

 

 1832년에 위고는 쥘리에트 드루에라는 여배우를 처음 만났고,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위고의 생애를 이야기하려면 그 주위의 수많은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녀를 넷이나 낳은 본처 아델은 남편의 외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신도 비평가 생트뵈브와 외도 행각을 벌였지만, 그래도 40년 넘게 꿋꿋이 가정을 지켰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위고의 애정 행각은 말년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 애인은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쥘리에트였다.

 

 1841년에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43년 가을에 제일 아끼던 딸 레오폴딘이 익사하는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위고는 작품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문학사가 랑송은 만약 위고가 이날 이후로 완전 침묵했다 하더라도 문학사에서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마련했을 것이라 단언한다). 대신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위고는 왕실과의 친분으로 1845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지만, 그해 여름에 여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는 굴욕을 맛본다.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대작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한다.

 

혁명과 망명, 그리고 개선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위고는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한다.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던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으로 향한다. 부인과 자녀는 물론이고 애인 쥘리에트까지 위고를 따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고독한 망명 생활 중에서 창작열은 더욱 뜨거워졌고, 위고의 시집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정관시집](1856)을 비롯해서 [세기의 전설](1859),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1866), [웃는 남자](1869) 등의 대표작이 연이어 간행된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위고는 9월 5일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지만 복마전 같은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금세 의원직을 포기한다.

 

그해 3월 13일에 위고의 큰아들이 갑작스레 사망하고, 불과 일주일 뒤에 파리에서는 코뮌이 수립되었다가 두어 달 만에 분쇄된다. 벨기에에 머물던 위고는 비록 코뮌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로 인해 위고는 졸지에 코뮌 동조자로 오해 받아 벨기에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위고는 가족과 함께 예전의 망명지인 건지 섬으로 떠나,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며 말년의 대표작인 [93년](1873)을 집필한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나다르가 촬영한 위고의 임종 모습.

 

 1881년 2월 26일,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위고는 8월 31일에 유언장을 썼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2년 뒤에 그는 위의 유언장을 더욱 짧게 고쳐 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전한다. 그들의 관 만드는 값으로 사용되길 바란다. 교회의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의 기도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 1885년 5월 18일에 위고는 폐렴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22일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검은 빛이 보인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날 밤에 파리에는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6월 1일에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레 미제라블, 하나의 세계이자 혼돈인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고아 소녀 코제트의 모습. 1862년 초판본에 수록된 에밀 바야르의 삽화.

“1861년 6월 30일 아침 8시 30분, 창문 너머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레 미제라블]을 끝냈다네. (...) 이제는 죽어도 좋아.” 젊은 시절부터 사회 고발 소설을 구상했던 위고는 1845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 16년 만에 망명지인 건지 섬에서 탈고했다.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집필 당시에는 제목이 [레 미제르](Les Misères, 비참함)였지만, 나중에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불쌍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주인공 이름 역시 원래는 ‘장 트레장’(Jean Trejean)이었지만, 나중에는 ‘장 발장’(Jean Valjean)으로 바뀌었다.

 

 [레 미제라블]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설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완독’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다. 축약이나 각색이 아닌 ‘무삭제판’ [레 미제라블]을 처음 접한 사람은 두 번 놀란다. 첫째로는 그 방대한 양에 놀라고, 둘째로는 그 유명한 줄거리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장 발장의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도 3분의 1 가량에 불과하며, 나머지 3분의 2에서는 19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와 풍습, 그리고 다양한 문제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서술되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은 툭하면 곁길로 새는 소설이다. 저자는 종종 장 발장의 행적을 따라가다 말고 갖가지 여담을 늘어놓는다. 장 발장이 수녀원 담장을 뛰어넘자마자 수도원 제도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가 끼어들고, 장 발장이 하수도에 뛰어들자마자 파리 하수도의 역사에 관한 장황한 이야기가 끼어드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 미제라블]이 걸작인 까닭은, 저자의 이런저런 여담을 걷어낸 핵심 줄거리가 매우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위대한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레 미제라블]은 인간의 갖가지 ‘전형’을 그려낸다.

 

 한때의 실수로 전과자가 되었다가 개과천선하지만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장 발장,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로 집요하게 장 발장의 뒤를 쫓는 형사 자베르, 모두가 외면한 장 발장에게 자비를 베푼 밀리에르 주교, 가난과 학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소녀 코제트, 사랑과 우정에 온 몸을 바치는 열정적인 청년 마리우스, 어떤 상황에서든 이득을 추구하기에 혈안이 된 악당 테르디니에 등 등.

 

 물론 단점도 있다. 저자의 장광설은 물론이고 빈약한 심리 묘사 때문에라도, 이 소설은 결코 인류 최고의 걸작이라는 반열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발장의 기구하면서도 놀라운 일생은 발표 후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압도적인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레 미제라블]은 앙드레 모루아의 말처럼 “서사시와 소설, 그리고 에세이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작품”이며, 테오필 고티에의 말처럼 “한 인간의 작품이라기보다 상황과 자연이 창조해낸 작품”이다. 그리고 랑송의 말처럼 “온갖 탈선과 삽화와 명상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소설,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이 가장 멋쩍은 수다 옆에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이 소설은 하나의 세계요, 하나의 혼돈이다.”

 

작가이며 정치인, 그리고 인간 위고

 위고의 활동 기간이었던 19세기 내내 프랑스 문단에는 스탕달, 발자크, 뒤마, 보들레르, 졸라, 베른 같은 위대한 작가들이 저마다의 대표작을 간행하며 각축을 벌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빅토르 위고만큼 생전에 큰 영예와 영향력을 누린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랑송은 위고의 성공 요인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에게는 풍부한 생산력과 악착같은 노력, 그리고 독자나 허영심 많은 경쟁자들을 다 같이 압도하는 끊임없는 창작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묘한 자존심과, 사람들에게 자기의 재능을 알아주게 하고 그것을 당당히 보여주는 수완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아닌 인간 빅토르 위고는 어땠을까?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위고는 강력한 휴머니즘의 소유자인 동시에 강력한 에고이즘의 소유자로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카멜레온에 가까운 변신으로 주위 사람들을 계속해서 놀라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열혈 왕당파로 행세하며 왕실과의 친분을 자랑했지만, 여러 차례의 변모 끝에 결국에는 열혈 공화파가 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지조 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휴머니즘이 위고의 최우선 신조였음을 기억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 때문에라도 위고는 왕당파나 공화파나 극좌파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었고 종종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한때 프랑스 문단에서 위고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쥘 르나르는 “빅토르 위고가 입을 벌려 말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입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라고 말했고, 폴 발레리는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에 쓴 시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드물다. (...) 다른 어떤 시도 이때에 씌어진 시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위고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점점 더 인색해졌다. 문학에서 사실적인 묘사가 중시되면서부터, 낭만주의적 색채가 강한 위고의 작품은 너무 과장되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파리의 노트르담]이나 [레 미제라블]의 대중적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는 200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나와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런 대중적 인기의 결과로, 위고의 작품은 다른 예술 분야에서 수많은 각색을 낳았다. 가령 베를리오즈, 비제, 리스트, 생상스, 라흐마니노프, 바그너 등의 작곡가가 위고의 시에 곡을 붙였다. 오페라 중에서는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쟈](1833), 베르디의 [리골레토](1851)와 [에르나니](1844), 퐁켈리의 [라 조콘다](1876) 등이 위고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뮤지컬로는 [레 미제라블](1980)과 [파리의 노트르담](1998)이 유명하며, 특히 앞의 작품에 나온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는 2009년에 영국의 중년 여성 수전 보일이 불러서 ‘인생 역전’을 이룬 노래로 유명하다.

[레 미제라블]의 영화화는 무려 30여 차례, [파리의 노트르담]의 영화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포함하여 10여 차례에 달한다. 영화화된 위고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소설 [웃는 남자](1869)다. 17세기 말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에 얼굴에 난 칼자국 때문에 평생 ‘웃는 얼굴’로 살아간다.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 중에서는 1928년에 미국에서 제작된 흑백 영화가 유명한데, 미국의 만화가 밥 케인은 이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이 창조한 슈퍼히어로 만화에 평생 ‘웃는 얼굴’을 한 악당을 등장시킨다. 그 인물이 바로 배트맨의 숙적인 ‘조커’였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 “위고는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디킨스처럼 보편성을 추구한 작가들 가운데 마지막에 속한다. 나는 20세기에 위고와 견줄 만한 작가가 없다고 생각하며, 21세기에도 그런 작가가 나올지 의심스럽다. 오늘날은 뮤지컬로 유명한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처음 출간되었을 때, 글을 아는 프랑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을 읽었다. (내가) 일흔한 살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뮤지컬로 만들지 못할 (문학) 작품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뮤지컬 햄릿]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리어 왕 쇼] 같은 것도 없다.” 어쩌면 블룸의 평가야말로 위고의 걸작이 지닌 강한 매력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말이 아닐까.

참고문헌: 앙드레 모루아, [빅토르 위고], 최병권 옮김, 우석, 1998; 델핀 뒤샤르, [빅토르 위고], 백선희 옮김, 동아일보사, 2003; 이규식, [빅토르 위고], 건국대학교출판부, 1996; 랑송 (외), [랑송 불문학사 (하)], 정기수 옮김, 을유문화사, 1989; 해럴드 블룸, [세계 문학의 천재들], 손태수 옮김, 들녘,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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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437 용문중학교 미술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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