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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Landscape in my mind | 패트릭
원문 http://blog.naver.com/chanwoolee/1014005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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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대 성당 오른쪽 끝에 위치한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에는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상이 있다. 대성당을 찾는 모든 전 세계의 방문자들이 꼭 한 번 보고싶어했던 인류의 대 걸작이다. '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동정(Pity)"으로 '동정녀 마리아(Virgin Mary)'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비통에 빠진 모습을 표현한 회화나 조각상을 말하는데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왔다.  

 

이 주제의 도상학적 근원은 북 유럽으로 프랑스에서 특히 유행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가 만들었을 때도 '피에타(Pieta)'는 아직 유행하지 않았다. 종교적 주제를 가진 조각품 중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나이 불과 24살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이 작품에만 작가의 서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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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 미켈란젤로(Michelangelo)' 전후의 예술가들은 언제나 '피에타(Pieta)'를 표현할 때, 죽은 예수의 시신을 팔에 앉고  비통해 하는 마리아 의 모습과 팔을 늘어뜨리운 채 죽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는 어떤 불가사의한 영적인 셰계를 느끼게 해주는 보는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인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천재 작가에 의해 인류에게 선사받은 이 웅장한 걸작은 종교적 관점에서의 인 간의 고통에 차원 높은  영적인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또한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의 '르네상스(Reneisssance)' 이상과  자연주의(Naturalism)' 사이에서의 균형 잡힌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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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십자가에서 내려진 뒤, 이미 숨이 멎은 예수를 무픝에 얹고 앉아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정결한 우아함으로 빛나고 있다.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장엄하게 수용하는 데서 나타나는 평온함을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는 엄청난 십자가와 가시관의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운 모습은 마치 고통의 시간 후에 피어나는 부활의 꽃처럼 우리에게 인간들의 삶에 고통을, 믿음으로 장엄하게 수용하고 견디어내면 평화와 평온함이 찾아올 것이라 이야기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자신 만의 해석으로 '피에타(Pieta)'를 창조해낸 시각은 기존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이에 대한 비통함을 나타내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장엄하게 슬픔을 수용하고 다시 찬란하게 꽃피우는 부활의 날들과 같이 평화를 맞이하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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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이러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에 대한 해석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국은 매우 작은 못에 난 성처처럼 작아보이고 옆구리의 성처의 징후도 그다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인간적 고통에서 벗어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왕으로서의 꽃처럼 피어난 부활을 상징한다.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은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에서 '베드로의 무덤(Peter's Tomb)' 다음으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고 또 가장 조용한 곳이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성모 찬송(Salve Regina)" 이나 “천주의 성모여, 당신 보호하심에(Sub tuum presidium)"나 또 다른 기도 등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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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수 많은 위대한 '피에타(Pieta)' 작품들 중의 최고 걸작일 뿐 아니라, '미켈란젤로(Michelangelo)' 자신의 작품들 중 최고 걸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4세 때, 당시 로마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추기경 장 빌레르 드 라그롤라(Cardinal Jean Bilheres de Lagraulas)'로 부터 인체 크기의 '피에타(Pieta)'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1498년 8월 27일에 정식으로 위임을 받아,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에 있어 이 작품은 '피에타(Pieta)'를 주제로 마무리 지어 완성시킨 첫 번째 작품이다. 이 놀라운 걸작은 대성당의 1500년 '주빌리(Jubilee)' 때 처음 공개되었다. 2년이 채 못되는 기간에, 한개 의 대리석 덩어리로 역사상 유래없는 경이로운 대걸작을 인류에게 선사하게 된 것이다.  

 

이 천재의 '피에타(Pieta)'에 대한 해석은 이전의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던 것들과 훨씬 달랐다.'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기존의 상심한 늙은 여인의 모습 대신에 청아하고 젊은 천상의 동정녀 마리의 모습을 창조해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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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작품을 처음 위임 받았을 때,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는 로마에 2년 간 머물며, 은행가 야코포 갈리(Jacopo Galli)'의 주문으로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돈을 받아 만든 큰 스케일의 작품을 2개 만드는데, '바쿠스(1496-98, Bargello Museum, Florence)'와 지금은 남아있지 않는 '큐피드-아폴로(Cupid-Apollo)' 상 2개 만을 끝내 놓고 있을 때 였다.   

 

작품은 옛날 '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자리에 세워져 있던, '콘스탄틴 대성당(Constantinian Basilica)' 내에 자리하고 있는 '산타 페트로닐라 소성당(Chapel of Santa Petronilla)'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아름다운 걸작에 대한 사람들의 찬사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내 그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당시의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곧 분노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MICHAEL. ANGELUS. BONAROTUS. FLORENT. FACIEBAT"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of Florence)'가 만들었다." 

 

이로써 그의 작품에 유일하게 작품의 서명이 남게되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나중에 이를 후회하였다. 하여 나중에 모든 그의 작품에는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젋게 묘사되어 있다고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도 예수가 삽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했을 때 마리아의 나이가 45-50세 정도 였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가 묻자,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정결한 생각을 가진 여자들의 모습은 결코 나이가 들지 않아 보인다."라 하였다. 실제로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어머니를 5 살에 여의었다. 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상은 영원한 젋음의 상징으로서 작가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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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추기경은 '피에타(Pieta)' 상을 자신의 무덤에 사용하려고 하였다. 1497년 어느 날, 추기경과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수수료에 대한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11월 18일에 추기경은 '로마 북쪽의, '투스카니(Tuscany)'에 있는 작은 공화국, '루까 공화국(State of Lucca)'의 관리에게 편지를 썼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조각 작품에 필요한 대리석을 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  

 

“우리는 최근에 피렌체 조각가, 마스터 '미켈레 안젤로 디 루도비코(Michele Angelo di Ludovico)와 이른바 옷을 입은 동정녀 마리아와 그녀의 품에서 죽은 벌거벗은 그리스도의 조각상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내의 어느 특정한 소성당에 세우는 대리석 묘지를 만드는 것에 대한 합의를 했다.  

 

그리하여 바로 작업해야 할 작품에 적합한 대리석을 찾아 운반하려하고자 합니다. 하여 이를 배려해 주실 것을 귀하께 요청드리오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  '루까(Lucca)'는 '카라라(Carrara)'와 같이 크고 좋은 대리석이 많이 생산되는 대리석의 보고로 알려져있다.

이들의 흰 대리석은 쉽게 떨어져나가 작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양질의 대리석이라고 조각가들 사이에 알려져왔다.  

 

 1497년 11월 말 부터 12월 말까지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카라라(Carrara)'에서 필요한 대리석을 구하고 있었다. 작품이 1500년에 완성되어 세워졌을 때, 빌레르 추기경(Cardinal Bilheres)'은 죽었다. 최초의 미술 평론집 "예술가 열전(Lives of the Most E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1550)을 쓴 작가이자 평론가인, '바사리(Vasari)'는 이 '피에타(Pietà)'에 이렇게 평하였다:  



 "작가의 재능에 의해 이미 더할 것 없이 만들어진 이 작품의 우아하고 고상한 디자인에 그 어떤 조각가나 뛰어난 예술가라 할지라도 이 이상 그 무엇인가를 더하겠다는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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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원래 '피에타(Pieta)'상은 옛날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자리에 세워져 있던, '콘스탄틴 대성당(Constantinian Basilica)' 내에 있는 '산타 페트로닐라 소성당(Chapel of Santa Petronilla)' 바깥쪽 왼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 1444-1514년)'의 대성당 신축 계획에 의해 1520년 소성당 일부가 헐리게되어 1749년에 대성당 '전면부(Facade)' 왼쪽의 사무국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곳은 교황이 행사를 집전할 때 의복을 갖추는 장소 중의 한 곳으로 사용되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568 년 바티칸 성당 참사회 회원(Vatican Canon)' 안토니오 카라파(Antonio Carafa)'의 제안으로, '피에타(Pieta)'는 이 곳에 자리하고 교황 식스투스 5세(Pope Sixtus V)'에 의해 '성가대 소성당(Chapel of the Choir)'의 제단이 세워지고 '원죄없으신 마리아(Immaculate Conception)'께 봉헌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자리는 곧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빈약한 조명으로 인하여 잘 보이지않고, 방문객들은 전례식 동안에는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성당 참사회 회원 '르도비코 비앙케티(Canon Ludovico Bianchetti)'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1575년의 성년(聖年, Holy Year)'에  그는 마리아의 목을 대리석 장식품으로 꾸미고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조각상을 올려 놓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조각상들 더욱 안보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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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 교황 바오로 5세(Pope Paul V)'는 1609년 성당 내에 새로운 복도를 만드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피에타(Pietà)'는 다시 옮겨져 새로운 '성가대 소성당(Chapel of the Choir)'에 자리잡기 위하여 성당 왼쪽 트렌젯(Left side Transet)'에 위치한, 이전의 '성 시몬과 유다 제단(Alter of St. Simonand Jude)', 지금의 '성 요셉 제단(Altar of St Joseph)' 너머에 있는, 교 회 법을 집행하는 방에서 임시로 자리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성가대 소성당의 제대(Altar of the Chapel of the Choir)'를 '원죄없으신 마리아(Immaculate Conception)'의 모자이크로 꾸미기로 졀정한 후에, 마치 2명의 마리아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1749 년 12월 3일 밤, '교황 베네딕트 14세(Pope Benedict XIV)'는 마침내 다시 한번' 피에타(Pieta)'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라고 명햤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의 건축가 '프란세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1599~1667 )'가 만든 현재의 둥근 타원형의 코타넬로(Cottanello)' 대리석의 기단이 함께 옮겨져 자리하게 되었다.



대 성당의 출입구 문가에 바로 위치하한 이 곳은 대성당을 들어오고 나갈 때 지나가도록 되어있는데, 원래 이 곳은 마리아와 '세례 요한(John the Baptimist)'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선지자로서, 또한 인간의 육신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피와 물의 상징으로서, 봉헌되어진 세례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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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1498-1499, 대리석, 174 cm × 195 cm,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작품은 전체적으로 피라미드형 구도로, 꼭지점을 이루는 구도의 정점에 마리아의 머리로 부터 늘어진 마리아의 옷자락이 작품의 맨 아래 부분인 골고다 언덕의 바위까지 펼쳐져 내리고 있다. 작품은 전체적 비례로 볼 때 통념적인 비율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떄 성장한 어른이 여자의 무릎에 누워있다 할 떄, 전체 길이가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더 밖으로 나와야 한다.

 

통상적으로 예술 작품에서 보여지는 '피에타(Pieta)'는 주로 '고딕(Gothic)' 조각에서 자주 보여지는데, 대체적으로 누워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 나와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는 일반적 비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고, 작품 제일 아래까지 늘어진 마리아의 옷을 이용하여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하였다. 이러한 피라미드 구도에 따른 작품의 비례적 구성은 작품의 조형적 부자연스러움을 없애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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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마리아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으로 부터 보호를 받아 현실의 어려움이나 위협들로부터 지켜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 작품에서 표현되는 인물들의 관계 설정이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앉겨 마치 평온한 모습으로 갚은 잠에 빠져있는 듯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이를 자애스러운 모습으로 내려다 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평화스러운 시선에서 두 인물들 간의 친밀한 관계를 매우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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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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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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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 피에타(Pieta)'의 도상학적 기원인 북유럽, 특히 독일, 폴란드(Poland)', '프랑스(France)'에서 유행하던 '피에타(Pieta)' 조각 예술의 전통은 아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탄에 빠진 마리아를 드러내기 위하여 조각에 채색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피렌체 조각 예술에서도 이러한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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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이 '피에타(Pieta)'상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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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피 렌체의 '다비드(David)상', 로마 '산 피에트로 성당(Bascilica San Pietre)'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 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피에타(Pieta)'상이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Pieta)'상은 1972년 5월 21일 오순절 오전 11시 30분 경,  헝가리 태생의 오스트레일리아인 '라즐로 토스(Laszlo Toth)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하며 울부짖으며 15번이나 망치로 가격을 하여 손상을 당하였다.  

 

당시 1972년 8월 5일 자 '뉴스위크(Newsweek)'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살인자의 공격:

473년이나 된, 온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조각가의 서명이 있는 '피에타(Pietà)'가 긁혔다 하다러도, 관리에 주의함이 정당화될 수 없는데. 하물며 이번 사건의 손상은 소름끼치도록 대단히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망치질은 '마돈나의 정결한 아름다움의, 슬픔에 잠긴 얼굴의 코를 가격하여 쪼개어 날려버렸고. 왼쪽 눈꺼풀과 목, 그리고 머리에 쓴 베일의 일부를 날려버렸으며. 또한 마리아의 왼쪽 어깨를 쳐서 팔꿈치가 부셔졌고, 손바닥을 쳐서 손가락들을 부러뜨려 버리고 만 것이다.     

 

꼼곰하게 깃털로 된 청소도구를 사용하여 바티칸 사람들이 약 50개로 조각난 대리석 파편들을 모았다. 부서진 파편 들 중 몇몇 조각들은 '피에타(Pieta)' 주위에 놓여있던 양초의 촛농에서 수집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중에 3개의 조각들이, 따로 '바티칸(Vatican)'으로 회수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관광객들이 기념품으로 들고 갔던 것들이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조각가 '쟈코모 만주(Giacome Manzu)'는 오로지 자신 만이 이 조각상을 원래대로 회생시킬 수 있다고 공언하였다. 1964년 '피에타(Pieta)'는 뉴욕 세계박람회(New York World's Fair)' 떄 찍어 본 '엑스 레이(X-rays)' 촬영 결과, 18세기에 조각상의 마리아 왼손 손가락이 부셔져 어느 이름모를 조각가에 의해 보수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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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또한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이렇게 다루었다.


마돈나에 망치질: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의 손상:

지난 일요일  정신불안의 33살의, 헝가리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인, 젊은 청년,'라즐로 토스(Laszlo Toth)가 서양 미술사에 최고 걸작 중의 하나에 가한 폭력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의 보호 저지대를 뛰어넘어. 울부짖으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 하고 외치며, 망치로 조각상을 가격하였다. 마리아상의 왼쪽 어깨와 코는 부서졌고 왼쪽 눈과 머리에 쓴 '베일(Veil)'은 조각나 버렸다.  

 

' 교황 요한 23세(Pope John XXIII)'는 뉴욕 대교구의 주교였던 고'스펠만 추기경(Cardinal Spellman)'에게 '피에타(Pietà)'를 '세계 박람회World's Fair)'의 '바티칸 관(Pavilion of Vatican)'에서 전시해 주겠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약속을 했다. 전람회에서 전시하기 위하여 '바티칸(Vatican)'으로 부터의 일시적인 이동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1965년 9월 교황 바울(Pope Paul)'은 향후 어떠한 예술품들이 '바타칸(Vatican)'에서 대여되지 않을 것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제출하였다. 

 

' 세계 박람회World's Fair)'에서 '피에타(Pietà)'가 전시되는 기간 동안,'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에서는 이 조각상의 복제 작업이 진행되었다. 19세기에, 무릎 꿇고 있는 모양의 교황 비오 6세(Pope Pius VI)' 동상이 떨어져 ,마리아의 손가락 3개가 부서졌다. 그리고 조각상은 19세기의 조각가 '카노바(Canova)'에 의해 속성으로 보수되는 사건으로 겪은 시련이 있은 이후에, 오늘날 벌어진 조각상에 대한 공격이, 가장 큰 피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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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피에타(Pieta)', '피에타 소성당(Chapel of Pieta)', '성 베드로 대성당(Bascilica di San Pietro Vatican), Rome, Italy 

 

 1973년 1월 17일 우리 나라의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놓았다.

 

" 지난해 5월 21일 오스트레일리아의 '라즐로 토스(Laszlo Toth)' 란 사나이의 쇠망치에 열네 번이나 얻어 맞아 성처를 입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걸작 조각품 '피에타(Pieta)'상이 감쪽같이 복원되어 공개를 기다리고 있다. 한가지 달라진 점은 '피에타(Pieta)'상과 관람자 사이에 두께 19mm, 높이 4.5m, 너비 4m, 무게가 반톤이나 되는 방탄 유리가 끼인다는 점이다. 이 방탄 유리는 벨기에에서 특수 제조된 것인데, 오는 2월 15일에 조립 작업이 끝난다"  

 

 

 

 

 

 

써니킴, 박경근, 송상희, 백현진(위부터 시계방향)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뉴스핌=이현경 기자] 올해의 작가상 2017 후보 4인은 모이기만 하면 화기애애하다. 서로를 치켜세우기 바쁘다. 작업하는 과정에서도 경쟁보다는 서로의 작품이 잘 보일 수 있도록 거침없는 조언도 오갔다. 그래서인지 작품저마다 활기를 띄고 있었다.

올해의 작가상 수상 후보 써니킴(48), 백현진(45), 박경근(39), 송상희(47)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각자의 세계관을 뚜렷하게 펼치고 있는 4인4색의 작품. 이들은 회화부터 조형, 영상미디어까지 장르도 다양해 관람객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작가가 직접 전하는 작품 이야기가 더해지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작품 제작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함께한다. 

오는 12월5일 올해의 작가상 수상의 영예의 주인공을 가리기에 앞서, 작가들의 열과 성이 담긴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지길 기대한다. 

◆써니킴의 그림에는 항상 소녀가 등장, 도대체 왜?

써니킴의 '교복입은 소녀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써니킴의 작품에는 항상 교복을 입은 소녀가 등장한다. 이제는 소녀가 그의 작품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 역시 바라는 바다.

이번 전시 '어둠에 뛰어들기' 아래 회화, 영상 작품이 펼쳐지는 가운데 역시 소녀가 직접 문을 열고 닫는다. 회화 작품인 '자줏빛 하늘 아래'에는 단발머리에 흰색 셔츠, 검정 치마, 검정 스타킹의 교복을 입은 소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뒤로 산, 물, 숲의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이어진다. 써니킴은 "소녀가 전시의 안내자이다. 우리가 때론 길을 잃곤 하는데, 거기서 마주하는 풍경을 담았다. 때문에 소녀를 바로 보는 것보다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시작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풍경을 담은 회화를 지나 회화 영상이 곁들여진 작품,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복 입은 소녀 네 명이 각각 등장한다. 그에게 '소녀'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이에 써니킴은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갑작스럽게 이민을 갔다"라고 자신의 사연을 전했다. 그는 "작업하면서 교복을 입은 소녀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겪지 못한 것, 한국에 있었으면 경험했을 이미지가 소녀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복을 살펴보면 한국식의 교복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대해 써니킴은 "특정한 시대의 교복을 구체화한 건 아니다. 상징적인 이미지를 떠올려 그린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써니킴의 작품이 선보이는 전시관은 자연광 들어서는 곳이다. 써니킴은 이 점을 전시관의 장점으로 꼽았다. 그는 "불을 끄고 자연의 빛으로 작품을 감상하길 원한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공기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변화도 일어난다. 빛에 따라 오브제의 색, 느낌을 그대로 느끼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백현진, 서울과 어울리는 휴게실 "느끼세요 있는 그대로"

백현진의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 휴게실' 내부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백현진 작가는 60평 정도 크기의 휴게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평범하진 않다. 굉장히 낯선 분위기의가 흐르고 입구부터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흰색 벽면에는 치킨, 파산, 그리고 여러단어를 검정색 스프레이 물감으로 써놓고 덧칠해놓은 흔적과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나뭇잎 모빌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문을 열고 들어선 휴게실 벽면에는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 휴게실'이라는 네온사인의 간판을 마주할 수 있다. 휴게실을 감싸는 '웅웅' 사운드도 작가가 직접 디자인했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휴게실 입구 <사진=이현경 기자>

그가 그 어떤 질문에도 계속해서 답한 말은 "그냥 느끼세요. 보이는대로 느끼시면 됩니다"였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보다 이 공간을 느끼고 즐기라고 강조했다. 벽에 걸린 작품들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도 휴게실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는 "롤플레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는 휴게실의 사장이었고, 그림을 걸고 싶어서 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저를 화가로 고용해 그림을 그렸다"고 답했다.

그는 사람마다 이 휴게실을 대하는 방법과 호흡이 다를거라고 설명했다. 백현진 작가는 "누군가는 책이 잘 읽히는 공간으로, 혹자에게는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다. 어떤 이는 멀미가 난다고도 하더라.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법에 따라 이 공간이 정해지는 거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휴게실의 이름을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 휴게실'로 지은 이유를 말하면서다. 그는 "서울과 가장 잘 어울리는 휴게실을 만들고 싶었다.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이 없으면 서울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모든 대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라고 답했다. 그의 휴게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프린트물이 있다. 각각 일련번호까지 새겨진 프린트물이자 작품이다. 그 위에 적힌 시를 읽으면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 휴게실'의 의미를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박경근, 군 트라우마가 작품으로

32개의 회로(왼쪽), 박경근의 '거울 내장:환유쇼' <사진=이현경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작품 '거울 내장:환유쇼'는 32개의 총이 각을 잡고 줄지어 세워져있다. '내려 총' '세워 총' '사격'의 신호를 32개의 총이 받고 있는 모습이다. 회로는 아날로그식으로 작업했다. 여기서 보내는 신호가 타이머에 맞춰 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그의 군 트라우마에서부터다. 군생활에서 로봇 같았던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녹여냈다. 서른 즈음에 입대한 그는 군시절 각종 굴욕을 겪었다고 했다. 일단, 군 문화가 낯설었다. 기계처럼 복종하는 반복된 군 생활의 연속이었다.(물론 그도 시간이 지나 이에 적응하며 지냈다) 마치 그 처럼 그의 작품 속 총들은 시간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사격 자세를 취했다.

양쪽 벽면의 설치된 두 대의 스크린도 눈길을 끈다. 이 스크린에는 관람객을 비추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백혁진 작가는 "이 공간을 무대처럼 생각했다. 조명과 화면이 있고 로봇(총)이 퍼포먼스를 하는거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카메라를 기계로만 보고 있다. 아마, 기계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을 거다"면서 "카메라가 감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기계가 우리를 보는 시선들, 스크린이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됐다"라고 설명했다.

32개의 회로도 미적으로 표현됐다. 붉은 색의 도선들이 엉킴 없이 제 자리를 잘 찾아갔다. 박경근 작가는 "저는 이 회로가 마음에 든다. 마치 불교의 회화 만달라 같기도 하고, 2층에서 내려봤을 땐 전선이 핏줄, 생명체 같기도 하다"라며 만족했다.

작품 제작의 뒷이야기도 들려줬다. 사용된 32개의 총은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장난감 총에 도색한 것이다. 제작비는 4000만원을 받았다. 백현진 작가는 실질적으로는 1억5000만원을 훌쩍 넘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32개 회선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청계천 상가의 사장님의 도움을 빌렸다. 재료도 아낌없이 제공해줬다"며 사장님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박경근 작가의 '거울 내장: 환유쇼'는 하루에 네 번 작동한다. 현장의 소리가 너무 울리기 때문이다. 오전 10시30분, 12시30분, 오후 2시30분, 오후 4시30분이다. 단 수, 토요일은 오후 6시30분에 1회 추가됐다.

◆송상희, 어둠의 이야기를 비추면 다시 빛이 된다

송상희의 '다시 살아나라 아가야'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송상희 작가는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라는 영상 작품을 전시했다. 세개의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소외된 이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이름 없는 존재의 흔적을 사진을 찍고, 텍스트로 표현하고 영상으로 제작했다.

그중 영웅설화 '아기장수'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말과 구원, 새로운 에너지를 다룬다. 그는 설화 '아기장수'를 택한 이유에 대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외에도 인혁당 사건의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더불어 윤희상 작가의 곡도 울려펴진다.

송상희 작가의  '세상이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소리 한번 없이 흐느낌으로'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그 맞은편에는 텍스트 타일 작품이 배치됐다. 작품은 '세상이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소리 한번 없이 흐느낌으로'다. 네덜란드에서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송상희 작가는 보통 청색은 네덜란드에서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 혹은 천국의 이미지를 작품으로 표현할 때 쓴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는 정반대로 표현했다. 파국의 현실과 인류 공멸의 위기에도 살아가는 텅 빈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시리아 내전, 2차세계대전이 폭발하던 때의 그림을 그려넣었다. 또 스피커에서는 1974년 골든레코드에 녹음된 55개의 언어가 흘러나온다. 이중에는 사양된 언어도 있다. 송상희 작가는 "이번에도 어두운 작품을 했다"고 웃으면서 "앞으로는 좀 밝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올해의 작가상 2017은 오는 2월1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된다.  

[뉴스핌 Newspim] 이현경 기자(89hklee@newspim.com)

 

 

 

내년 하반기 20년 만에 복원 완료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단은 석탑 해체 과정에서 3차원(3D) 스캐너로 수백 장의 입체 영상을 촬영했다(첫번째 사진). 해체 과정에서 나온 3000여 개에 달하는 석재 역시 하나하나 3D 스캐너로 촬영해 정밀한 설계도를 완성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적국인 백제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노래가 퍼졌다.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 보내고, 기다리던 서동은 공주와 백제로 돌아가 왕(무왕)과 왕비가 됐다.’

 백제 민요 ‘서동요’의 줄거리다. 단순한 ‘러브스토리’ 같지만 국보 11호인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석탑과 관련이 있다. 백제 멸망 무렵, 미륵사를 지키기 위해서 신라와 관련이 있는 사찰인 것처럼 소문을 냈다는 전설이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지은 미륵사지석탑은 9층 규모였지만, 현재는 파괴돼 6층까지만 남아있다. 이 석탑을 보전하기 위해 1998년부터 보수를 해왔다. 당초 작업기간인 10년을 훌쩍 넘긴 2017년 하반기, 미륵사지석탑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 다시 태어난다. 미륵사지석탑의 최종 복원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익산의 미륵사 현장을 찾았다.


○ 석재 3000여 개 레이저 장비로 스캔

 미륵사지석탑 복원의 최대 난관은 참고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 2009년 석탑 1층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통해 건설 시기가 639년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초기 모습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문화재청과 전북도는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재연) 연구진을 주축으로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단’(정비단)을 꾸리고 복원에 들어갔다. 훼손이 심각했다. 일제강점기 때 막무가내로 보강한 콘크리트가 탑의 절반을 덮고 있어 흉물스러웠다. 정비단은 남아있는 탑의 구조를 꼼꼼히 파악해 최대한 과학적으로 원형을 추정하기로 했다. 원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7∼9층은 새로 만들지 않고 6층까지만 복원하기로 했다.

 정비단은 우선 남아있는 석탑을 완전히 해체했다. 탑 뒤쪽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는 망치와 정, 치과용 드릴을 이용해 깎아냈다. 이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석재는 모두 3000여 개. 정비단은 해체 순서를 모두 기록하고, 3차원 스캐너로 석탑의 전체 구조 형상은 물론 해체한 석재 하나하나를 모두 입체 영상으로 촬영했다. 3차원 스캐너는 레이저를 쏴 물체에 부딪혔다가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물체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장비다. 석탑 부지 전체(156.25m²)를 한 번 스캔하는 데 30∼40분 걸린다. 정비단은 해체 과정에서 스캔을 수백 번 반복해 정밀한 석탑 영상을 얻어냈다.

 이와 동시에 1300년이 넘은 석재의 보수작업도 진행됐다. 탑에서 나온 석재는 깨끗이 씻고, 파인 부분은 돌가루로 메웠다. 미세한 균열이 있으면 ‘에폭시’ 등으로 균열 부위를 채웠다. 크게 부서진 석재는 부근 채석장에서 강도와 성분이 가장 비슷한 화강암을 구해 와 티타늄 봉을 박아 본래 형태에 가깝게 다시 만들었다. 내부에 봉을 잘못 박으면 석재에 금이 갈 수 있었다. 따라서 실험용 화강암에 실제로 봉을 박아 가면서 최적의 위치와 개수를 찾았다. 16년째 보수작업에 참여 중인 김현용 문화재연 학예연구사는 “수가 많다고 무조건 튼튼해지는 게 아니라서 최적의 수와 위치를 매번 일일이 계산해야 했다”고 말했다.

○ 국내 석탑 복원기술 발전 이끌어

 석재 보수가 끝나고 탑을 다시 쌓는 작업이 시작된 건 2013년 11월. 정비단은 해체 작업 중 얻은 3차원 데이터를 분석해 정밀한 모형을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 탑을 설계했다. 본격적인 조립에 앞서 지반 보강 공사를 선행했다. 1m²마다 1만 번씩 두드려 다지는 평탄화 작업을 하고 석탑을 받치는 돌을 깔았다.

 정비단은 현재 석탑 2층 상단부를 조립 중이다. 내년 하반기에는 6층까지 완성할 예정이다. 김 연구사는 “계획보다 작업이 늦어졌지만 수백 년 뒤 후손도 볼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역사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정비단은 미륵사지석탑 복원작업은 국내의 석탑 복원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강조한다. 복원 초기에는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앞선 기술을 배워왔고, 국내 사정에 맞는 새로운 신기술을 개발할 때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얻은 특허만 다섯 건이다. 김 연구사는 “최근엔 국내 다른 석탑 보수공사 때도 미륵사지에서 얻은 노하우가 쓰이고 있다”며 “석재 복원 경험이 많은 캄보디아나 베트남 전문가들도 미륵사지석탑 복원 기술을 배우러 오고 있다”고 말했다.
 
송준섭 동아사이언스 기자 joon@donga.com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437 용문중학교 미술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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