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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미술사

중국미술

중국미술의 개요

중국의 미술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된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전개해 왔다.
은(殷)·주(周) 시대에는 청동기가 발달하였다. 중장하고 화려한작품으로 가득한 이 시대 조형미술의 전통은 그 이후 고대 중국미술의 지주가 되었다.
진(秦)·한(漢) 시대에는 옛 무덤의 벽화와 만리장성이 축조되어 그때의 생활상과 뛰어난 기술을 알 수 있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인도로부터 불교 미술이 전래되어 돈황에 석굴 사원이 축조되었고 불교 조각이 성행하였다. 중국미술에 있어 돈황의 석굴미술은 동서 문화 교류를 고찰하는 실마리를 던진다. 돈황의 석굴은 서역을 지나 돈황에 도착한 소조미술을 중국 본토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색의 농담에 의한 음영법이 서방에서 전래되어 중국 회화계에 영향을 주었다.
수(隋)·당(唐) 시대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이며 중국미술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북종화와 남종화가 등장했으며 전통적인 중국조각의 성격이 정립되었다. 당대(當代) 수묵화는 서방회화의 채색대신 먹을 사용하였고, 단순히 대상을 감각적으로 본뜨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생명을 본뜨는 정신을 으뜸으로 여기는 근본정신이 확립되었다.
 

1. 선사시대 (先史時代)
중국에서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형물이 출현한 것은 신석기시대 후기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인류의 생활은 있었다.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원인은 40∼50만년 전에 불을 사용했다. 용골산 원인동에서 출토한 석기는 10만점에 달하여 작은 돌조각이 상당수지만 정교한 첨두기가 있다. 구석기 후기로 가면 붉은 조개껍질의 윗부분을 갈아 구멍을 뚫은 것과 새들의 뼈를 작게 갈라서 갈아 만들어 선각(線刻)한 것 등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는 석기가 주로 생산도구로 쓰인 데 반해 토기는 주로 생활용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토기의 제작이야 말로 본격적인 미술의 창조였다.

 

2. 은과 주시대
중국의 미술은 오늘의 하남성을 중심으로 황하 유역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시기상으로 보면 은(殷)과 주(周) 시대는 중국의 청동기 문화에 해당한다. 은(殷, B.C.1300년경)시대와 주(周,B.C.1000년경)시대는 옥기(玉器), 토기, 동기(銅器)등의 형태가 다양하고 정교하다.

건축과 조각 은(殷)시대 초기부터 흙을 다져서 만든 토단 위에 목조의 궁전건축이 지어졌다.


은(殷)시대   중기 유적이 있는 정주에서는 흙을 다져서 만든 성벽과 후기 안양에서는 깊은 도랑이 발견되었다. 상형 문자를 통하여지상 건축물에 나무로 된 지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주(西周)시대   기와가 출현한다. 또 은(殷)시대 후기의 것으로 그릇의 발이라고 생각되는 호랑이, 올빼미 등의 모양을 한 대리석 환조가 있는데 양식화 경향이 강하다. 같은 시기에 코뿔소나 숫양, 송아지, 코끼리 등의 모양을 본 딴 연옥(軟玉)의 소품이나 청동기가 있는데, 이것들은 각 동물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중국 최초의 우수한 기법과 괴기하고 미려하게 새긴 도안 무늬는 다른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주로 자연신교 사상에서 나타난 구름, 비, 번개, 물결무늬 등과 다복안락을 표시하는 괴기하고도 복잡한 무늬와 용, 호랑이, 부엉이, 꿩 등의 동물 무늬 등은 단아한 고전미를 보여준다.

 

회화와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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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殷)시대 후기에 깊은 통 모양의 그릇 4∼5개를 하나로 묶어서 화구(畵具)를 넣어두었던 것이 알려져 있지만, 그림 그 자체가 남아 있지는 않다.
점을 볼 때 사용했던 동물의 견갑골에 사슴, 코끼리, 원숭이를 선각한 회화가 약간 알려져 있는데 거침없는 선으로 이들 동물을 능숙하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은시대 초기부터 청동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은·주 시대의 청동기에는 이기(利器)와 병기(兵器)가 있다. 이기(利器)는 제기(祭器)로서 주기(酒器)·식기(食器)·수기(水器)·악기(樂器)로 분류되지만 각각 여러 종류의 다양한 기물이 있으며, 예술적으로 매우 뛰어나 세계의 청동 제품 가운데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주나라 때에 청동은 길금(吉金)이라고 불렸으며, 그러한 기물들에 새겨진 문자, 즉 금문(金文)은 그 시대의 역사나 예악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도기·도자기 가운데는 대개 회색의 무유도(無釉陶)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녹갈색 또는 등록색의 회유를 칠한 경도(硬陶)가 만들어져 후대 청자의 선구를 이루었다.
은(殷)나라 때에 칠은 무기류나 목관에 바르는 정도였으나, 서주시대(西周時代)에 이르러서는 칠기(漆器)가 그릇으로 사용된다. 동물 뼈, 뿔, 상아 등도 주걱이나 비녀, 그릇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3.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이른 중국고대의 변혁시대이다.
은(殷)·서주(西周)시대의 제도를 이어받아, 토단 위에 목조건축이 지어졌다. 높은 토단 위에 몇 층의 목조에 기와를 얹은 궁전이 지어졌다. 전국시대에는 동근 통기와의 앞부분에 반원형의 와당을 붙이고, 동물이나 수목 등 다양한 문양을 덧붙이는 양식이 시작된다.
춘추시대는 양식화된 조각으로서 목조, 칠도(漆塗), 채색한 괴수형의 분묘 수호신이 남아 있으며 자연의 모사, 생명을 뛰어나게 표현한 것으로 기물을 장식하는 동물형 환조 등이 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로 내려오면 그 유물에서 출토지도 확산되고 출토자료도 풍부해지는데 특히 동제(銅製) 조각에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다수 나타난다. 우선 하남성 금촌 출토의 말과 매사냥 인물상등을 들 수 있고 하남성 이현에서 출토된 동제인물상이 있는데 단순하고 꾸밈없는 조각이면서도 양감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치는 청동기의 장식에 그림자그림 형식 및 선각으로 된 회화적 표현이 남아 있어 일부회화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주제는 궁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오락, 사냥, 전쟁, 귀신 등으로 주로 측시형(側視形)의 표현을 하며 측면상의 여자 및 봉황, 용을 먹으로 그린 전국시대의 비단그림이 유명하다.
춘추시대 전기에는 청동제의 무기로 창, 방패, 칼, 청동제 화살촉이 만들어졌으며 청동 그릇은 서주 시대 후기와 같은 종류가 제작되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도 많다. 중기에는 문양이 점차 세밀해지면서 바탕무늬 같은 것으로 변한다.
또 가죽 허리띠를 잠그는 구(鉤)와 거울이 많이 제작된다.
도기는 분묘 부장품 가운데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장례용의 명기가 많다. 진흙질 회도(灰陶), 모래가 섞인 거친 회도(灰陶), 진흙질 홍도 등이 있으며 회도(灰陶)가 주류를 이룬다. 방격문(方格文), 능형문(菱形紋), 우상문(羽狀文) 등의 인문(印文)이 있으며 몸통이 둥글게 부푼 항아리가 주류를 이룬다.

 

4. 진(秦)·한(漢) 시대
이 시대는 봉건사회로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외래 문화의 수입과 전파 시대이다. 어지럽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감행하고,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으나 그 치세는 짧았다.
한나라는 서양의 로마 제국과 같이 정치와 군사에서는 강하였으나 문화와 예술에는 앞 시대의 모방에 치우쳐 독창력이 적었다. 이시대에는 다양성의 통일이 조화된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양식을 낳았는데, 재현적 기법과 상징 및 추상화 과정이 혼합된 것 이다.
진(秦, 기원전 221∼201)은 단명한 왕조였지만, 전대까지의 중국 건축을 총괄하여 새로운 진대 건축을 창시했다.
위수의 남쪽에 아방궁과 같은 대 건축을 한 것을 비롯하여 여산 의북쪽 기슭에 대규모의 시황제 왕릉을 축조하고 만리장성 대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가 주목된다. 장려한 궁전에는 돌로 만든 소와 고래, 구리로 만든 기린과 용의 조상으로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진(秦)·한(漢) 시대에는 묘당의 화상석(畵像石)이나 토기, 동경(銅鏡) 등 시대성을 살필 수 있는 미술품이 전해지고 있다.
공예 기술의 진보도 빠뜨릴 수 없다. 동조품(銅造品)으로는 산동성 출토의 동제등잔과 하북성 만성현 출토의 등잔이 있는데 모두 인물상을 수반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하북성 출토의 '장신궁등'은 한대(漢代)에 동조 인물상의 제작 기술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한(漢)대에 전하는 그림들은 모두 지하무덤에서 출토된 분묘미술이다. 따라서 무덤 안을 장식했던 벽화나 화상석, 화상전이 주요 미술품인데 회화적 표현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지상의 것과 큰 차이는 없다.
표현된 내용들은 신화와 역사적 사실, 고사, 일상생활, 유교적 주제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산둥 지방의 화상석에 표현된 인물이나자연 묘사는 그야말로 고식의 미를 한껏 보여준다.

 

5.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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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魏·蜀·吳)시대가 지난 뒤 위(魏)가 천하를 통일하고 뒤이어진(晋)도 나라를 세웠지만 이민족의 압박에 의해 천도를 이전하여천도 이전을 서진(西晋), 천도 이후를 동진(東晋)이라 했다.
이시대의 미술은 한나라와 수·당의 전환기로서 서역적 요소가 적어지고 중국적 요소가 풍부한 과도기의 성격을 가졌다. 중국의역사가 정착기로 접어든 시기는 이 시대이며, 페르시아, 간다라 등 서방 문화의 영향까지 받아 미술의 성격이나 양식에도 많은 변화를가져왔다.

건축과 조각   불교 석굴이 외래 문화의 영향에 의해 발생된 것도 이 시기이다.
석굴의 조각이나 회화 중에는 제작 당시 건축의 외관이나 세부를 보여주는 것도 있는데 특히 원강(雲崗), 룽먼(龍門), 둔황(敦煌) 등 대규모 석굴불이 유명하다. 이 석굴불을 통하여 불교 조각과 불교벽화 부문에 서 많은 유품을 남기고 있다.


회화와 공예   회화는 타율적인 제약에서 해방된 문인화라는 양식을 낳았다.
이 시대에는 현실을 초월한 노장의 사상이 유행하여 사실(寫實)을 초월한 추상적인 동양화의 선을 강조하였고, 산수화를 발전시켰다.
이 때의 회화는 기존의 원시적인 상하법을 대신하여 대상을 내려다 보는 부감법이 성립하고, 깊이 있는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공간 처리가 분명해지고 인물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한다. 아직 전경, 중경, 후경 사시에 자연스러운 진행이 없고 크기나 비례가 잘 맞지 않으며 인물들에도 개성 표현이 없는 등 고풍스러운 표현을 간직하고 있다. 주제상으로는 기존의 유교와 도교에 새로 들어온 불교가 주 배경이 되며 신화적인 색채는 퇴조한다.
한말의 서화를 겸한 사대부 화가가 출현해서 필선만으로 그리는 백묘화(白描 )가 창시되었고 문학적인 제재를 즐겨 채택하였다. 처음으로 산수화를 그리고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고개지(顧愷之)는 「여사잠도권」을 남겼고 산수화에 있어서의 시각적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는 신기론(神氣論)이란 화론(畵論)을 펴 사혁(謝赫)과 함께 동양 회화의 원류가 되었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畵品錄)」이란화평(畵評)에서 회화의 근원이 되는 육법(六法)을 논하였다. 송병(宋炳)의 산수화는 고개지에 비해 솔직하고 간명하며, 그가 발견한 '지척천리(咫尺千里)'라는 투시 원근법은 서양보다 천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위(魏)·진(晋) 시대의 서예는 예서에서 해서로 이동하는 전환기였다. 동진(東晋)에서는 행·초서가 성하였고 왕희지 부자가 서체를 완성하였다.

 

6. 수(隋)·당(唐) 시대
중국의 수(隋, 581∼618)는 비록 3대 38년 만에 단명한 왕조였으나,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졌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고 후세까지 남는 대사업을 시작하여 뒤이은 당의 번영에 기반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건축과 조각   건축이나 조각은 인도 계통의 영향이 보인다.
당의 수도인 장안에는 수나라 때 조성된 대흥궁 외에 삼내(三內)라하여 세 군데의 궁전 즉 태극궁과 황제가 상주했던 대명궁 그리고 홍경궁이 있었다.
수나라때는 문제가 즉위하자 불상을 많이 만들거나 수리하였다. 수나라때 유물로는 용문석굴의 약방동 본존과 양협시 보살, 제남 옥함산 불곡사의 수상 등이 있다.
견고한 석재 구성으로 웅장한 얼굴과 체격이 특징이다.
남북조의 양식을 이어받은 수나라의 조각은 당나라 시대에 들어서자 서역풍을 종합한 예술로 발전하여 소상(塑像)이 유행하였다. 불상은 팔다리와 몸의 균형이 좋고 반투명에 가까운 의상으로 관능미를 나타내었으며, 육조시대의 똑바로 선 자세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한쪽 발에 중심을 두고 허리를 약간틀어서 가슴에서 허리로 흐르는 원만하고 유려한 곡선미를 나타내고 있다.
초당 전기에는 장안에서 만들어진 명문이 있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동그스름함과 부드러운 당대의 특징이 나타난다.
석굴의 조각이 아직 남아 있고, 목조각, 도상(陶像), 소상(塑像) 등이 발달하였다.

 

회화와 공예   수나라는 회화에 있어서도 남북을 통합했다.
북조계의 화가가 남조의 양식을 흡수한다는 화북 중심의 통합이었다.
수에 이어 대제국이 된 당은 외국 미술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제적 색채가 풍부한 화풍을 낳았다. 전기에 전래된 헬레니즘의 흐름을 섭취한 굽타조 양식의 인도미술과 사산조양식의 이란 미술이 중국인에게 형사(形寫)라 불리는 새로운 자연주의와 표현 기법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는 중국 회화의 독자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이며 중국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인물, 도석, 산수, 화조가 많이그려졌으며 각기 개성적인 표현을 하게되어 각각의 유파로 발달하게 된다. 즉 남화, 북화의 개념이 확립된다.
당나라의 회화는 외래양식을 소화하는 한편 고유의 전통 양식과 융합한 이른바 종합성을 가진 회화 예술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수묵화풍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남종 문인화의 출발을 뜻한다. 초당(初唐)의 대표적 화가인 염입본(閻立本)은「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직공도(職貢圖)」로 유명하다.
후기 회화의 특색은 외래 영향의 중국화와 전통의 존중인데,그러한 경향은 전기의 후반에 보인다. 사녀화, 화조화나 묵화는 측천무후 시대에 시작되고, 성당기에는 천재화가 오도현(吳道玄)이 백묘화를 부흥시켰고, 그에 입각하여 회화의 지도이념인 사의를 제창했다. 또 오도현(吳道玄)은 당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불교,도교에 관한 것을 많이 그렸고, 이러한 필법이 오가풍(吾家風)이라 불리며 당대를 풍미했다. 이른바 '산수의 변혁'을 창시하여 산수·수석화를 자연주의의 계열에 편입시켰다.
이사훈(李思訓)은 북화의 시조이며, 귀족적 묘법으로 금벽청록(金碧靑綠)의 산수로 유명하다.
후기의 산수화가는 수묵산수화 발전의 기초를 세운다. 특히, 왕유(王維)는 남화의 시조이며, 남방의 풍경을 주로 초속적인 태도로 그렸다. 선담(渲淡)의 묵법이라 하여 수묵의 멋을 십분살렸으며, 대상의 묘사보다 정감 어린 운치를 주관적으로 표현하였다. 사녀화, 화조화, 산수 수석화는 공적인 목적보다 사적인 감상에 봉사하는 경향이 강한 분야이고, 후세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수·당의 공예양식은 한나라의 제도를 답습했다.
당나라 시대의 미술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공예이며 그 중당경(唐鏡)과 같은 금속공예가 유명하다. 도자기 공예가 발달하였고 특히 당삼채(唐三彩)가 유명하다. 유약의 변화에 의하여 기물에 나타난 도안의 묘미는 현대 회화의 비구상적 표현양식과도 공통된 점을 보이고 있다.

 

7. 송(宋) 시대
송대는 북송시대(960∼1126)와 남송 시대(1127∼1279)로 나뉘어진다.
북송시대는 오대(五代)의 문화를 이어받아 요(遼)와 대립하고, 남송시대는 양자강 이남의 문화를 주체로 하여 금(金)과 병립하였다.
원래 중국의 회화는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송대에는 이러한 불교 도덕에서 해방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순수한 회화로 독립하게 된 시기이다.

 

건축과 조각   선종의 진출로 인하여 예배불상을 중시하지 않는 국가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북위(北魏)로부터 수와 당에 걸쳐 번성했던 석굴과 석불의 조상(造像)은 거의 없어졌다. 송 시대 조각의 특색은 당시불교의 서민성을 보이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유행하였다. 친근감있는 휴머니즘의 표현으로서 현실적인 여성미를 나타내었다.
송(宋), 요(遼),금(金) 시대의 조각은 완전히 당(唐)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우아함과 자유스러운 수법이 다소 늘어났으나 웅대함과 숭고함을 상실하여, 점차로 비속하고 섬약함에 빠졌다.

 

회화와 공예   중국에서는 '육조(六朝)의 서(書), 당(唐)의 시(詩), 송(宋)의 화(畵)'라는 말이 있다. 화원이 융성한 것은 송조가 최고였으며, 한림 도화원을 설치하고 화인을 우대하였다. 북송말의 휘종과 남송초의 고종은 궁정예술가를 양성하여, 송나라의 예원을 크게 번성시켰다. 문인화 예술 풍조가 유행하여 소동파(蘇東坡)와 미불과 같은 이름높은 사람이 나타났다.
북송 시대에는 오대에 이어 형호와 관동의 뜻을 따르는 화가들이 많이 나타나 화북 산수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전통적 사실주의와 신흥 이상주의의 2대 화풍이 성행하였다. 전통적 사실주의는 앞 시대의 전통을 지키면서 대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표현하는 원체화풍의 화조화와 북송 화풍의 산수화를 연결시켜 나갔다. 이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포착하여 그 속의 생명감과 인간을 이어주는 자연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흥 이상주의는 기성 형식에 거리낌 없이 마음의 이상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문인·사대부·승려 등 재야의 비전문적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수묵 담채화풍의 화자와 사군자,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를 아울러 성립해 나갔다. 그들의 화풍은 자연을 단순하게 추상화하여 수묵화의 형식으로 이상적 세계를 개척하려했다.
이러한 양대 양식은 원말사대가를 거쳐 이사훈(李思訓)과 왕유(王維)를 시조로 하는 이른바 남북 2대 화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성의 뒤를 이어 범관, 곽희, 허도녕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 더욱 다양한 화북 산수화가 나타났다.
곽희(郭熙)는 11세기 산수에 능하였으며 고원, 심원, 평원의 삼원 화법을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의 시초이다.
또 허도녕의 「추강어정도(秋江漁艇圖)」는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그림에서 치솟은 산의 기상과 필력은 화북 산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강남에 자리잡았던 남송에서는 화원을 중심으로 강남 지방의 경치를 주로 그리는 직업 화가 화풍이 성행하였다. 주변 경치에 어울리는 화법을 쓰다보니 자연히 강남 산수풍의 소경(小景)산수로 회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휘종은 제왕 화가로서 유명하다. 섬세하면서도 강한 필선으로 그린 휘종의 산수화풍은 후기의 대표적 산수화가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예술을 낳은 원류가 되었다.
마원은 이당(李唐)의 화법을 흡수하여 자기류의 화풍을 성립시킨 화가이다. 그의 산수화풍은 일본 산수화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초기 이상좌, 강희안에도 미쳤다. 하규, 이적은 용필과 용묵이 뛰어나고 각기 개성적이다.
목계는 문인화의 명수로서 당대의 대표적 화가이다. 선종 승인답게 번잡한 것에서 벗어나 마음 속의 것을 일필로 표현하였다. 그의「소상팔경도」는 기존의 준법이나 필법을 따르지 않고 간결함과 상징성으로 표현하여 한 차원 높은 수묵의 미를 살리고 있다.
송대는 중국 도자기 예술의 황금기이며 청자, 백자, 적회 등 명기가 많다. 그 밖에 회고려(繪高麗)는 흑갈색 무늬가 주는 이국적 감각을 풍긴다. 당삼채(唐三彩)의 영향을 받은 송삼채(宋三彩)도 있다. 송대의 자기는 우리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8. 원 시대
원은 무력으로 한민족을 정복하였으나 예술적인 독창력은 없었으므로 송의 예술을 그대로 계승하여 다음 대인 명(明)에 계승하였을 정도이다.

 

회화와 공예    null 회화는 시대 양식으로서 간단하게 추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런 양식, 형식의 혼란은 명시대의 절파, 오파, 원파 등을 생겨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 초기의 산수화는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賦)등에 의한 복고운동에서 시작되어 주로 북송 산수화가의 양식과 묘법이 연구되었다.
그러나 북송 산수화풍의 양식이나 묘사 형식을 적당히 취해 화면을 구성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리고 형태나 기법에 대해 지나친 편집 경향만 띄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 등을 [원 대의 4대가]가 배출되기 전까지 계속된다.
원사가(元四家)는 오대의 동원, 복송의 거연에 기초를 두고 발전하여 필묵을 중시하고, 서법과 시문을 결합하였다. 이는 원래 산수화의 주류로 명·청 양대에 걸쳐 영향이 지대했다.
원나라 시대 도자기의 경향은 전통적 사실풍에서 벗어나 비정통적 사의풍(寫意風)으로 흘러갔다.

 

9. 명·청 시대
명대는 4세기 이상에 걸친 북방민족으로 부터 해방되어 한민족의 지배가 부활된 시기이다. 명은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돌을 사용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오늘날에 보는 만리장성은 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건축과 조각    명조 300년은 건축이 발달하여 특히 궁궐 건축이 훌륭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베이징의 자금성이다. 베이징의 자금성과 태묘(太廟)는 명대 초기의 웅혼한 기풍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많은 건축이 청대에 들어 대수리되었다.
불교 신앙은 일반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는데, 목조천의관음상, 대원 숭선사의 소조 천수관음상, 봉성사의 나한상, 칠금목조좌불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15,16세기의 것으로 북경 서산 와불사의 청동 석가열반상, 북경서산 벽사의 소조 좌불오존상, 십팔나한상이 있다. 이 시대에는 명대 초기의 위엄이 친근감있게 변하면서 사실적 작풍으로 변한다.

 

회화와 공예   초기의 화단은 남화 일색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으나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법은 섬세하나 약하고 주제는 산수는 화조와 사군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독창적인 화법과 사고로 그림을 그린 왕시민, 왕감, 왕휘 그리고 명승으로 그림으로 잘 그린 팔대산인, 석계, 석도 등이 유명하다.
석도는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실경산수를 많이 그렸다.
황산을 그린 여러 장면에는 실제의 경치에 충실하기보다는회화적으로 아름다운 구도와 먹과 멋진 조화를 이룬 담채 등 무한한 변형이 이루어진다.
석도의 친구였던 팔대산인도 분출하는 창의력을 작품에 담았는데 「성난 물고기」나 「두 마리의 까투리」등을 보면 산수보다는 화조, 영모 등 분야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그는 필력이 날카롭고 핵심을 잘 포착하여 후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기 화단은 산수화보다 화훼, 영모 등의 화조화에 치중되었고, '양주팔괴(楊洲八怪)' 라는 괴이한 작가들은 독창적인 화풍을 보였다. 청말의 임백년, 오창석, 오역등도 좋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10. 중국 근·현대미술 (中國 近·現代美術)
중국 근대 회화는 청의 말기부터 시작되는데 그 때 궁정화가가 화단의 중심이었던 풍토에서 벗어나 각지에서 유력한 화가의 배출을 기다리는 상황이 출현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 제일의 개항 도시가 된 상해에서는 화가들이 모여 들었는데 여기에서 조지겸(趙之謙)과 임이, 오창석(吳昌碩)이있다.
임이의 영향은 청말부터 민국 초기에 걸쳐서 상해 화단 전반에 나타났으며 오창석의 영향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세기 전반에 전통 화풍을 새로운 시대에 접목시긴 화가로는 제백석(齊白石)과 황빈홍(黃賓虹)이 있다. 북경의 화단에서 명성을 얻은 제백석은 팔대산인과 석수, 오창석 등의 감화를 받으며 독특한 화풍을 수립하였다.
미술학자이기도 했던 황빈홍은 당송 시대 회화의 깊은 맛을 살린 산수를 그렸다.
이밖에 20세기 전반의 동향으로는 노신(魯迅)의 제창으로 이루어지는 목각화 운동, 대중과의 의사 소통을 주안점으로 한 새로운 중국 회화로의 방향도 주목되었다.

 

인도미술

1.인도미술의 개요

인더스문명의 대표적 유적은 당시의 2대 도시였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인데,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를 받았던 하라파 유적의 이름을 따서 고고학적으로는 하라파문화라고 부른다. 19세기 중엽에 영국인 알렉산더 커닝엄이 하라파 유적을 조사하였지만, B.C. 3000년기의 고대문명으로서 확인된 것은 1922∼23년 시작되었던 양 유적 발굴의 결과였다.
모헨조다로는‘ 사자(死者)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J.H.마셜에 의해, 후에는 E.매케이에 의해 발굴되었다. 하라파는 《리그베다》에 전하는 할리 유푸야라는 추측도 있다. 하라파는 M.S.버트에 의해 발굴되었고, 그 후 찬후다로(chanhu-daro) 등 같은 종류의 문화가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현재까지 총계 100개소 이상의 유적이 보고되고 있다. 이 유적 가운데 남쪽의 소라스트라 지방의 것은 인더스문명 후기 또는 그것에 이어지는 아(亞)인더스문명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인더스문명권 중에서 하라파는 인더스 상류유역 펀자브 지방의, 모헨조다로는 하류 유역인 신드지방의 수도로 추정된다.
인더스문명 여러 도시의 특징은 질서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또 건물의 대부분이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들어졌다. 모헨조다로·하라파 등은 모두 도시의 서쪽 부분에, 성벽(城壁)을 둘러친 평행사변형으로 계획된 성채(城砦)가 있고, 동쪽에는 시가지가 놓여 있다. 하라파에서는 이 성채가 발굴되지 않았으나, 모헨조다로에서는 성채의 언덕 위에 대욕장(大浴場)·승원(僧院)·회의장·대곡물창고 등의 공공시설 또는 지배자를 위한 시설이 있었다. 대욕장의 북쪽 작은 길 건너편에 소욕장(小浴場)이 2열로 늘어서 있는데, 이 소욕장은 신관(神官)들이, 대욕장은 일반시민이 각각 의례를 행하기 위하여 목욕재계하는 데에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모헨조다로의 성채 위에서 발견된 곡물창고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것이 하라파의 성채 기슭에서도 발굴되었다. 6동(棟)씩 2열로 늘어선 하라파의 곡물창고는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토대벽(土臺壁) 위에 고상식(高床式)으로 세워져 있었다. 상(床) 아래의 토대벽과 토대벽 사이는 공동(空洞)으로 되어 통풍관의 구실을 하였으며, 창고의 내부가 습기차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라파에서는 이 곡물창고 바로 옆에 벽이 얇은 14동의 건물이 2열로 늘어선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의 1동은 2개의 방으로 된 빈약한 것이었다. 모헨조다로에서도 똑같은 형의 아파트식 건물이 세워져 있는 시가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일반시민의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자의 아파트라고 생각된다. 성채의 밑 기슭에는 시가지가 있고, 주민들의 주택이 큰길과 골목길과 양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주택 외에 상점·식당도 있었으나, 하라파나 모헨조다로에는 신전이나 왕궁이라 불릴만한 대건축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인더스문명   도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상·하수도 시설의 발달이라 할 수 있다. 욕실·부엌·변소 등 각 가옥의 하수는 통로를 통하여 하수도로 배수되었다. 하수도는 벽돌을 쌓아 맞추어서 만들어졌으며, 아치식 천장을 가진 대형의 하수도도 있었다. 음료수는 전적으로 우물물이었으며, 가정에 설치된 개인용, 도로가에 설치된 공공용 등이 있다. 아(亞)인더스문명에 속하는 로탈(Lothal)에서는, 독(dock) 같이 보이는 구축물도 발굴되었다.
유물로는 토기·석기·청동기 등이 있으며, 종류로는 각종 용기(容器)· 꾸미개[裝身具]·이기(利器)·인장·석조(石彫)·토우(土偶), 도량형 문자, 식물의 종자 등이 있다. 토기에는 가지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있고, 유약을 입힌 도기도 있다. 무늬의 종류에는 원을 교차시켜서 만든 나뭇잎무늬·어린(魚鱗)무늬·격자목(格子目)무늬·빗살무늬·파상(波狀)무늬· 신장형(腎臟形)무늬·보리수나 야자 등의 식물무늬, 공작무늬·어(魚)무늬 등이 있었으며, 드물지만 새끼사슴에 젖을 먹이는 암사슴과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는 남자를 그려넣은 것도 있다. 또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단지는 화로 또는 치즈나 맥주의 찌꺼기를 거르는 그릇이라고 하며, 인더스문명의 특징의 하나이다. 그 외에 고배(高), 밑바닥 안쪽에 손잡이가 달린 공기도 특징적이었다. 석기에 많았던 것은 가늘고 긴 차트제의 석인(石刃)으로, 주로 낫이나 손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기의 발달은 활발하지 못하였고, 동제품도 빈약하여 편평한 것이 많은데, 도끼·끌·칼·화살촉·창날 등으로 도끼는 주조한 것이고, 끌은 두들겨 만든 것, 칼·활촉·창날은 편평한 동판(銅板)을 잘라서 만든 것이다. 이 밖에 무기에는 흙으로 만든 투탄(投彈)이 있다. 꾸미개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비즈 구슬이다.
재료로는 금·은·동석(凍石)·홍옥수(紅玉髓)·마노(瑪瑙)·조개·도기(陶器) 등이었으며, 그 밖에 연옥(練玉)·유약을 바른 구슬이 있다. 특색 있는 구슬은 세잎무늬를 식각(蝕刻)한 구슬로, 이 무늬는 널리 서아시아에서 사용되었던 무늬이다. 그 밖에 반지·팔찌·핀 등의 꾸미개가 있다. 직사각형으로 된 주로 동석제(凍石製)인 인장(印章)은 인더스문명의 특색 있는 유물인데, 소·코끼리·악어 등 각종 동물이 표현되어 있고, 그 밖에 외뿔짐승[一角獸]과 3면(面)의 신인(神人)등 상상의 동물 또는 신을 나타낸 것도 있다.
특히 3면의 신인은 후의 힌두교 시바신의 조형(祖型)이라고 추정된다. 이 인장 위에는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해독하지 못했다. 인더스식 인장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어서 인더스문명의 연대결정의 단서가 된다.

2. 마우리아 왕조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제국을 세운 왕조(BC 317~BC 180)이다.
후기 아리안족의 문화권과 세력이 주변의 군소국가를 통합하여 강대한 군주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BC 3세기경에는 찬드라굽타왕의 마우리아왕조가 생겨났다. 그는 페르시아 등 주변국가와 적극적인 무역활동 및 문화교류를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를 입증하는 현존하는 유품은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이던 아소카왕 시대의 석조건물이다. 아소카왕은 불교사상 및 경전편찬을 장려한 숭불왕이었다.
아소카왕 석주는 추나르산(産) 사암(砂岩)을 재료로 한 원주로서, 옛 문헌에 30여 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종모양 석주의 머리부분은 연꽃잎을 새겨 내려뜨리고 있다. 이는 사자장식 동물조각과 함께 당시 궁정미술가들이 페르시아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며, 석주의 인동무늬는 주변의 아시리아의 영향이라고 본다. 완전한 형태인 라우리아난단가르 석주는 1기(基)뿐이며 이외에 불완전한 9기 중에는 4성수가 1조가 된 사르나트 출토의 석주, 람푸르바에서 출토된 사자주와 황소주[雄牛柱] 등이 있고, 주두의 환조(丸彫)로 된 4성수(四聖獸)는 동물의 형태와 근육묘사가 뛰어나다. 이러한 석주의 표현방식은 아시리아·페르시아의 석주형식을 많이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후대에 걸쳐 사원 및 조각형식에 깊은 관계를 지니게 된다.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 석주와는 대조적으로 인도 고유의 풍을 보여주는 포크햄 출토의 야크샤상(像)과, 베스나가르의 야크시니 여신상 및 소상(小像)의 토착신상들은, 기존의 전통적 목조수법(木彫手法)에 의해 만들어졌다. 서민계급의 민간예술가들은 마우리아왕조의 궁정예술가와는 상이하게 토속적 조형감각으로 풍요·다산의 민간신앙을 표현하였다.

3. 쿠산왕조

null간다라 미술   기원 전후부터 5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북서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미치는 왕조였다. 대월지(大月氏)가 서쪽으로 옮겨서 서(西)투르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반부를 지배했을 때에 영지(領地) 안에 설치한 5제후(諸侯)의 하나인 귀상(貴霜:쿠샨)에서 발전하였다.
기원 전후 쿠줄라 카드피세스 때에 다른 4제후를 쓰러뜨리고 힌두쿠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간다라를 지배하였다.
그 후 카니슈카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는 등 쿠샨왕조 전성기를 이루어 간다라 미술 등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대승불교도 이 때 성립 발전하였다. 그러나 226년 파르티아 대신에 사산왕조가 이란에서 발흥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병합하자 쿠샨왕조는 그의 번속국(藩屬國)이 되었다. 사산왕조의 세력이 이완되자 그 세력을 회복하였으나(기타라쿠샨왕조), 5세기 후반 에프탈에게 멸망되었다. 간다라 지방은 동서양을 잇는 길목으로, B.C. 4세기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과 문화 융합 정책은 동서양 미술 교류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문화가 서로 융화된 독특한 미술이 생기게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그리스풍의 불교 미술로 나타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불상 조각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유적으로 불탑이나 절터가 남아있다.
간다라 미술은 열주식(列柱式) 석굴양식과 당초 무늬, 인동 무늬와 함께 서역과 중국 등으로 퍼졌다. 불탑은 중인도의 오래된 복발탑 형식을 일찍부터 이어 받았으나 점차로 기단을 몇 층씩 겹쳐서 높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하였으며, 또 이를 부조로 풍부하고 장엄하게 장식하였다. 불탑으로는 카니시카 대탑이 유명하다. 간다라 미술이 급속하게 발전된 것은 쿠샨 왕조로 들어서면서부터인데 그 발전은 통상의 번창과 전래된 불교에 대한 독실한 믿음 등에 의한 것이다.
간다라 미술의 중심을 이루는 조각은 석조를 주로 하는 전기와 소조를 주로 하는 후기로 대별될 수 있다. 내용적으로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 불전도가 가장 많고 보살상이나 천부상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들 조각은 얼굴 모습이나 옷 주름 등 모두 그리스풍으로 특히 사실성이 풍부한 것을 특색으로 하며, 서방의 조각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도 적지 않다.

4. 굽타왕조

아잔타 미술이 시대는 힌두문화가 꽃을 피운, 문화사상 중요한 시대이다. 힌두문화는 다른 민족의 지배와 불교·자이나교로 인하여 제압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도 발전, 보급되고 있었으나 자료가 적게 발견되었을 뿐이고 결코 부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굽타왕조의 역대 제왕이 힌두교를 신봉하여 브라만 고전에 규정된 마사제(馬祀祭)등의 제전을 베풀고, 산스크리트를 공용어로 채용하여 산스크리트의 지위를 확립한 일은 힌두문화를 위해 다행한 시기였다. 그때까지 발전해온 사상·문학은 고전적인 완성을 보았고, 동시에 신앙·미술의 측면에서 새로운 발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문학에서는 사무드라굽타가 시를 읊은 왕이고, 그를 찬미한 하리세나가 지은 알라하바드 석비(石碑)내용은 산스크리트 문학의 걸작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시성으로 숭배해온 칼리다사가 4∼5세기의 교차 시기에 활약하여,《샤쿤탈라》등의 희곡과 시를 지었고, 또 시·희곡·설화문학 등의 뛰어난 작품이 출현하였다.
브라마나 사상에서는 육파철학(六派哲學)의 주요 경전(經典)이 이 시기까지 성립되어 브라만철학의 고전적 체계가 갖추어졌고, 《마누 법전(法典)》에 이어서 《야쥬뉴바르키아 법전》이 성립되었다. 브라만의 특권적인 지위를 유지 확보하기 위하여 생활규범이 영원한 법으로 제시되었고, 사법의 규정을 중심으로 한 《나라다 법전》 등이 나왔다. 그리고 이 시기에 브라만의 베다학파가 확립되었고, 여러 학문의 학파도 성립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경전이나 논소(論疏)를 받들어 이들의 주석이라는 형식으로 발전시켜 갔다. 힌두교는 크게 발달하여 탄트라·샤크타 교의(敎義)가 발전하였으며, 동시에 《마하바라타》의 독송(讀誦)이 보급되었다. 또한 힌두교의 활성화는 미술의 현저한 발전을 가져왔는데, 오늘날에 남아 있는 아잔타·에로라·산치·나시크·바그 등의 훌륭한 유구(遺構) 모두가 이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이 초기의 유구에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영향을 볼 수 있으나, 점차 인도의 고유한 양식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조상(彫像)에서는 간다라미술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간다라 양식과는 그 취지를 달리하여 얼굴의 모습이나 옷맵시의 표현에는 뚜렷이 인도적인 면이 나타나 있다. 이것을 굽타양식이라 하는데, 중국에 들어와서는 당나라의 불교미술이 되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 백제의 불교문화를 이루었으며, 더 나아가서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奈良]의 불교미술을 낳은 점은 특히 주목할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교도 상당히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법현(法顯)의 여행기에서 알아볼 수 있고, 아상가[無著]·바스반두[世親]의 유식교학(唯識敎學)이 대성하였으며, 또한 교학의 전당인 나란다 가람(伽藍)이 세워졌다. 그러나 브라만 철학을 모방하여 경전· 논소를 산스크리트어(語)로 썼고, 제왕의 신성을 인정하였으며,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설파하는 경전이 나왔다. 그리고 불교문화는 힌두교 민간신앙의 영향을 받아 밀교(密敎)의 성립을 유도하였다.
굽타 제국(帝國)의 번영에 수반한 인도 국민문화의 흥륭과 전인도적인 확산은 미술에서도 새로운 예술이념과 세련된 기법에 의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인도미술사상으로 본다면, 굽타 시대에 성립한 미술이 굽타왕조가 붕괴한 이후 하르샤왕 1대까지 이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약 350∼650년의 기간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500년 전후를 경계로 굽타왕조 및 후굽타왕조로 구분해야 하겠으나, 양식적(樣式的)으로는, 양자를 구분할 수 있을 만한 근거는 없다. 이 시대는 문화사상 힌두문화의 부흥으로 특징되나, 불교도 여전히 성행하여, 결국 굽타 미술을 주도하여 주목할 만한 발전과 완성을 실현한 것은 전시대 이래의 융성을 계승한 불교미술이다. 이 기반 위에서 아잔타의 벽화와 사르나트의 불상조각 등 인도가 세계에 자랑하는 걸작을 이룩한 것이다.
 
불상조각   null 이 시대의 불교미술, 특히 조각은 쿠샨 왕조 시대를 대표한 3가지 미술에서 시작하여 불상·보살 등의 조상(彫像)제작이 중심이 되었다. 먼저 굽타 세력권 밖에 있던 북서지방에서는 간다라의 헬레니즘계(系) 미술이 전시대의 석조(石彫)를 대신하여 소조미술(塑造美術)로서, 4세기 말부터 단기간이나마 번영하여, 스타코 및 점토로써 하는 소조분야에서 일단 기법상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굽타왕조 미술과 직접적인 교섭은 없었으나, 그 서양적인 사실(寫實)과 불상 표현에서의 불교적 이념의 구상화와의 조화로 보아, 굽타미술의 형성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굽타왕조 미술의 기조(基調)를 이룩하는 데 남인도미술, 즉 안도라미술의 기여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남부에서의 미술활동은 300년 전후의 나가르쥬니콘다 이후로는 볼 만한 것이 없으나, 굽타왕조의 여러 화폐에 나타나 있는 왕의 초상이나, 마투라 불상 등에서 볼 수 있는 인체 표현의 여러 요소, 특히 새로운 프로포션의 체계는 이 안도라계(系) 미술의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제작면에서 굽타 석조의 새로운 전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마투라였다. 여기에서 굽타 초기에는 여전히 전시대의 양식과 수법을 답습하고 있었으나, 5세기가 되자 야샤딘나 봉헌(奉獻) 불입상(佛立像)이 대표하는 바와 같이, 종전과는 일변한 새로운 양식의 조상(彫像)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기법이 세련되고 익숙해진 점과 새로운 기준의 균제미(均齊美)가 뚜렷이 엿보인다.
이 굽타 양식을 갠지스강 유역에 도입하여 다시 발전시킨 사르나트의 미술은 5세기 후기에서 6세기에 걸쳐 번영하여, 전법륜불(轉法輪佛)과 그 밖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 사실로부터 추상(抽象)하여 이상화시킨 조형 표현은 불교사상이 요청하는 원만·정적의 경지와도 합치하는 것이며, 인도의 환경에서 나온 불상의 최고봉을 차지한다. 이렇게 완성된 아름답고 투명할 만큼 엷은 법의를 걸친 모양의 불상은 서인도의 아잔타 석굴 등에도 조형되었다. 그리고 6세기 이후에도 그와 같은 양식의 전통은 중부 인도의 불적지(佛蹟地:나란다 등지)에 보존되어 있고, 석조(石彫)뿐 아니라 주조(鑄造)도 술탄간쥬가 발견한 거대한 동상을 제작할 정도로 당시의 기술은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힌두교미술은 401년 명(銘)이 있는 우다야기리 석굴의 부조(浮彫)를 시발로, 이 종교에 있어서도 미술활동이 점차 남북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보다 뒤늦게 출발한 힌두교미술은 당시의 힌두문화의 번영과는 병행하지 못하고, 다음 시대에 들어가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불교회화   조각과 더불어 회화도 발전하였을 것이지만, 유품은 아잔타 석굴의 벽화뿐이다. 그러나 가장 융성했던 당대의 회화가 인도 문화의 태반을 차지하고, 그 분량도 적지 않아 다행한 일이다. 아잔타 벽화 중에서 굽타 시대에 속한 것은 500년 전후의 바카타카왕조가 굽타 세력 아래서 이 지방을 지배하던 당시의 제16·17 두 굴과, 그보다 조금 뒤의 제1·2 두 굴의 벽화로서, 아잔타벽화로서는 최후기에 해당하며, 비교적 보존도 잘 되어 있다. 주제는 그 이전의 벽화와 마찬가지로 본생도(本生圖) 및 불전도(佛傳圖)가 주이고, 조각이 존상(尊像) 중심의 표현이었던 것과 대조적이지만, 여러 자태를 취한 불상이나 관음의 그림 등, 시대의 풍조를 풍자한 묘화(描畵)도 상당히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구도가 번잡한 흠이 있으나 윤곽은 뚜렷한 선으로 훌륭하게 처리되었고, 충전법(充塡法)에 의한 채색도 선명하며, 선염법(渲染法)과 하이라이트로 명암을 강조하였다.
모두가 전아한 표현 속에 인도의 정취가 넘치고, 종교화이면서 세속적인 묘사가 많은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그 중에서도 제16굴이 뛰어나고, 제17과 제1의 양굴(兩窟)이 그 다음이며, 제2굴은 마지막 작품으로 다소 딱딱하다. 이 아잔타와 거의 같은 시대의 것으로 버그 석굴 벽화가 있으나, 대부분이 벗겨져 있다. 또한 실론의 시기리아에도 구름 위에서 산화(散華)하는 귀부인과 시녀의 반신을 그린 벽화가 몇 개 있는데, 이것도 굽타양식으로 5세기 말의 작품이다.
 

건축   이 시대의 건축은 석굴을 제외하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몇 개의 석조 가구건축(架構建築)의 유례(遺例)를 볼 수 있고, 불교의 것 외에 힌두교의 사당(祠堂)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당건축은 중후하여 안정감을 강조하고, 평지붕과 문광(門)의 장식이 특색이다. 산치 제17호 사당(5세기), 아이호리의 라드칸사(寺:5세기), 데오가리의 사당(7세기) 등이 그것이다. 중세에 들어와 보급된 고탑상(高塔狀)의 시카라건축은 그 시대 또는 조금 이전에 시작된 듯하며, 5∼6세기 초기 양식의 유구(遺構)가 남북에 산재해 있다. 유명한 부다가야의 대정사(大精舍)도 이 무렵에 조영한 것으로, 후세에 보수했으나, 여전히 굽타 시대의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 시대의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의 석굴사원이고, 힌두교 석굴도 처음으로 조성하였다(우다야기리 및 바더미). 불교의 석굴은 고대기 이래의 배경을 가지고 개굴기술(開掘技術)도 그 장식의장(裝飾意匠)도 가장 발전한 시대이다. 주요한 것은 서인도의 산악지대에 몰려 있으며, 아잔타·버그·칸헤리·에로라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역시 차이토야굴과 비하라(승원)굴의 두 굴이 있고, 모두가 종전의 목조건축적 요소가 적어지고, 그 대신에 정면과 기둥 및 작은 벽에 너무 많을 정도로 풍부한 부조장식이 있다. 그리고 주로 승원굴의 경우에는 다시 전랑(前廊)이나 좌우랑(左右廊)의 벽을 채화(彩畵)로 채우고 실내장식을 가일층 강조하였다.
차이토야굴의 경우 정면창(正面窓)이 점차 작아지고, 본존의 불탑 정면에 불상을 조각하며, 또 승원굴에서는 오전(奧殿)을 두어 불상을 모신 일 등은 이 시대 석굴사의 특색이다.
이 시대 미술은 굽타 제국의 흥성과 고전문화의 전개, 확산을 배경으로 5∼6세기를 전후해 새로운 예술 이념과 세련된 기법에 의한 최성기의 수준을 이룬다. 굽타 왕조 미술은 아잔타 미술로 대변된다. 아잔타는 봄페이의 동북 450km의 산간에 있으며 벽화 중 오래된 것으로는 B.C. 100년 정도의 것부터이지만 대부분 6,7세기 때 것이다. 아잔타 석굴은 인도의 석굴 건축 중 가장 큰 불교적 석굴이다. 안은 정교한 목조 양식의 건축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벽면에는 섬세하고 공교로운 릴리프로 조각한 벽화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마투라와 사르나트가 불상 제작의 중심지로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특히 불상에 있어서 원만하고 단엄한 인도적 고전 양식을 완성시킨 것 이외에, 굽타 문화권의 지방에서 석굴사원이 제 2 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름다운 색채, 풍만한 몸체, 독특한 살붙임 등 인도 특유의 것이다. 아잔타 벽화는 석굴 속에 웅대한 구도와 능숙한 필치로 불교의 전설이 그려져 있으며, 인도의 대표적 회화이다. 지금까지 조형미술에 관심이 희박했던 힌두교가 점차로 신상이나 석굴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부터이다.

 

일본미술

1.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

아스카 시대의 미술은 크게는 중국의 육조시대 위나라와 직접적으로는 우리 나라의 백제와 신라의 불교 미술 양식을 받아들였다. 백제의 아좌태자는 일본에 건너가 성덕태자상을 그려 주었다고 한다. 다카마쓰 옛 무덤의 벽화는 고구려 바탕에 토착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 일본의 고대 문화가 한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나라 시대의 미술은 중국 당나라 미술을 받아들여 불교 미술이 성행하였으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그림으로 고구려 스님 담징이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인「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는 일본 회화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null2. 헤이안 시대(794~1185)

견당사 파견을 중지한 894년을 분기로 하여 헤이안 전기와 헤이안 후기로 양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헤이안 전기는 나라시대 이래 당의 문화가 일본으로 이행되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사이쵸와 구우카이가 당불교의 교학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과 진언종을 창시했다.
궁중에서는 한시와 한문이 성행하는 등 높은 수준의 문화가 형성되었고, 9세기 후반에는 '가나'문자가 나타났다. 9세기말에는 독자적인 일본 문화가 성장했다.
10세기경에는 권문세가의 장원이 늘어나 화려한 궁정 문화가 조성되었다. 헤이안 후기에는 자연을 동경하여 자연과 생활을 조화시키는 주택 건축 양식이 생겼다.
이 때 야마토에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 양식이 성립되었고 이후 일본 문화의 고전이 되었다. 11세기에는 궁정 문화가 완성되었으며 정토교 미술이 유행하였다. 한편 민중에 관심을 돌린 설화문학과 민중의 모습을 소재로 다룬 에마키모노가 나와 귀족 사회 말기의 새로운 시대적 기운을 반영했다.

3. 카마쿠라 시대(1185~1333)

쿄토의 공가(公家)와 카마쿠라 지방의 무가(武家)가 대립 또는 교류하면서 이원적 문화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강력한 힘을 추구했던 시대의 내면에는 아름다움을 회상하는 무상관(無常觀)이 감돌았다.
새로운 미술의 출발점은 도다이지의 부흥 사업이었다. 남송의 건축 양식이 채용되고 텐표 양식의 복고적 성격의 불상 조각이 조성되었다. 후반에는 무가의 지지를 받은 선종의 송원 문화가 카마쿠라에 이식되어 수묵화가 시작되기도 했다. 한편 정토종·진종·시종등 신흥 종파와 남도 불교는 포교활동에 에마키모노를 활용했고, 수이쟈쿠 미술도 성행했으며 민중의 감각이 미술에 나타 나기도 했다. 말기에는 쿄토·카마쿠라에 중국 취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4. 무로마치 시대(1333~1573)

새로운 아시카가 막부의 권력과 남북조 통일, 대명 무역 등을 기반으로 한 시대였다. 이 시대의 미술은 선종미술과 무가(武家)의 카라모노(唐物) 취미등으로 상징된다. 송원화(宋元畵)를 규범으로 한 정상과 도석인물화가 부흥하고, 카오오와 모쿠안등의 선승 화가가 나타 났다.1368년부터 1441년까지 계속된 키타야마 문화에서는 수묵화가 애호됐고, 공무(公武)와 연가(連歌)가 성행하였다. 슈분은 남송과 조선의 산수 양식을 섭취하여 수묵화를 일본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467년부터 히가시야마 문화가 탄생했는데 이 시대 문화적 성격은 서원·정원 ·차 꽃등을 취미로 하는 왕조문화와 민중 문화의 성숙을 특징으로 하는 장식적인 쇼헤이화와 공예등이 발전했다.
특히 한화(漢畵)가 융성했는데 소오탄, 쇼오케이, 가쿠오를 비롯하여 다이토쿠 지일파, 코아미파, 카마쿠라파, 카노 오파등이 유명하다. 카노오파의 카노 모토노부는 야마토에의 기법을 가미하여 근세 회화의 기초를 확립했다.

5. 모모야마 시대(1573~1615)

쇼쿠호 정권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권력에 의해 근세로 진입한 시기로, 고대·중세적인 권위의 몰락을 반영한 강렬한 표현과 호화로운 장식을 보여주는 현세주의적 인간 중심의 문화적 경향을 볼 수 있다. 전국을 통일한 여력은 장대한 성을 구축하고, 미술의 제 분야를 동원하여 장대한 장식 미술을 창출했다. 평화로운 현세를 반영한 의장(意匠) 감각과 고전 문화의 부흥을 의도한 공공연한 결집 등의 기운도 이 시기의 특색이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센리큐의 '와비차'는 간소하고 한적한 미의식을 추구하여 당시의 호화로운 미의식에 대응했다. 여기에서 일본화적인 독자적 화풍이 싹트기 시작한다. 무가의 초상화, 부처와 부인상, 유아상등 풍속화가 확립되었고 쇼헤이(障屛) 그림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금·은을 사용한 금벽화가 유행하였다.
소서원(小書院)등의 사적인 곳에서는 수묵화를 선호했다. 이 시대의 화가들은 중국 그림을 일본화하고 다각적인 표현으로 유파를 형성했는데 카노오파가 대표적이다. 성화(聖畵)의 모사와 서양 판화의 제재를 이용한 인물도, 세계도 등을 제작한 풍속도 있었다.

null6. 에도 시대(1603~1867)

막번체제 확립에 의한 봉건 사회가 완성되고 사농공상의 신분제와 쇄국 등의 정책으로 국내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
상공업의 발달과 민중 계급이 형성되고 봉건제와의 갈등이 표출된 갖가지 문화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모모야마 양식이 남아있는 웅장한 금벽장 벽화가 묘사되어 화조화, 풍속화 등이 주제가 되었다. 전통적인 미술이 보급되었고, 주자학을 관학으로 한 무가(武家)의 미적 선호 경향이 나타났다.
소타즈는 민중을 기반으로 하여 야마토에의 전통을 장식적이고 독특한 양식으로 창조했는데 이것은 린파로 계승되었다. 또 신흥계급의 성장으로 사치스런 속세의 향락을 추구하는 미술이 전개되었다.
중기 이후에는 나가사키를 통하여 수용된 청나라와 네덜란드의 지식에 의해 서양화가 탄생했다.
후기에는 막번의 모순이 심화되어 퇴폐적인 풍조가 가득했고 도시 대중들 사이에는 가부키등 상징적인 미의식이 유행했다.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유리공예는 병, 그릇 , 잔 등으로 실용화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437 용문중학교 미술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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