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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이야기  l  Art Story

  • May 28, 2015
  • 677

히시카와 모로노부와 그의 제자, 조수들, 즉 히시카와파()가 제작한 판화는 단색 판화였다. 먹으로만 찍어대서 ‘스미즈리(り)’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색판화가 발전했다. 스미즈리에 물감을 붓으로 군데군데 입히기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붓으로 물감을 칠하는 대신에 여러 개의 색판을 겹쳐 찍게 되었다. 다색 판화도 처음에는 홍(), 황(), 녹(), 삼색뿐으로, 색의 수가 많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이러던 판화가 18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원색과 중간색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풍성한 다색판화로 발전했는데, 이는 에도의 부유한 호사가들 사이에 벌어졌던 경쟁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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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도요노부, [소원을 적어 벚나무 가지에 거는 여인], 1741년, 우루시에(), 미시간 대학교 미술관이 그림처럼 화면에 부분부분 아교를 섞은 먹을 칠해서 옻칠을 한 듯한 광택을 낸 판화를 ‘우루시에()’라고 한다.

스즈키 하루노부, [밤의 신사참배], 18세기 중반, 주반니시키에, 도쿄 국립박물관‘주반()’은 ‘오반()’의 2분의 1 크기로 약 29.3×19cm이다.

1765년 무렵 에도에서는 이른바 ‘에고요미() 교환회’라는게 유행했다. 에도 시대에 채용되었던 태음력에서는 30일로 된 큰 달()과 29일로 된 작은 달이 번갈아 가며 있었는데 달의 크고 작은 순서가 매해 달라졌다. 그래서 해마다 연초에 달의 크고 작음을 그림으로 표시해 놓은 판화를 만들었는데, 이를 ‘에고요미’라고 한다. 말 그대로 ‘그림 달력’이다. 그런데 호사가들은 각자 에고요미를 주문해서는 누구의 에고요미가 화려하고 아름다운지를 겨뤘다. 우키요에 판화가들은 고객의 자존심과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조금이라도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판화를 만들기 위해 궁리를 거듭했다. 이런 국면에서 등장한 화가가 스즈키 하루노부(, 1725-1770)이다. 하루노부의 에고요미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기에 주문이 그에게 쏠렸고, 에고요미 경쟁은 시들해졌다. 그러자 이때 하루노부와 그 동료들이 만든 에고요미의 판목()을 영세한 출판업자들이 양도받아 다시 찍어내서 판매했다. 부자들이 비싼 값을 치러가며 만들게 했던 판화를 서민들이 싼 값에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키요에 판화의 질이 전체적으로 높아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다색 판화를 ‘아즈마니시키에(, 또는 )’라고 불렀고 나중에 ‘니시키에()’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아즈마’는 에도의 별칭이었고, ‘니시키’는 이 무렵 교토의 특산품이었던 다색 비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니시키에’는 교토의 비단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의미였다. 니시키에에 이르러 우키요에 목판화의 기법은 완성에 이르렀고, 이후 니시키에라는 말은 종종 우키요에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우키요에 판화의 제작 시스템

우타가와 구니사다, 『사농공상()』 시리즈 중 [우키요에 판화 공방의 모습], 오반니시키에 3매 연속 세트, 1857년, 도쿄, 마치다 시립국제판화미술관 우키요에를 만든 이들은 모두 남성이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여성들이 작업하고 있다. 우키요에의 제작 공정과 함께 미녀들의 모습을 감상하도록 한 것이다. 맨 왼쪽에 담뱃대를 들고 앉아 있는 이가 한모토이고, 그 오른쪽이 스리시이다. 망치와 끌로 판목을 다루는 호리시, 붓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에시와 견습생들이 보인다.

우키요에 목판화는 육필화와는 달리 화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 구성된 한 팀이 만들었다. 이 팀의 구성원들은 우선 ‘한모토()’와 ‘우키요에시()’로 나눌 수 있다. ‘한모토’는 이 팀을 꾸려가면서 판화의 제작을 둘러싼 여건을 조성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제작자나 프로듀서 같은 구실을 했다. 한모토는 제작 비용을 대고 작업장을 마련했으며 팀원들이 완성한 판화를 판매했다. 팀원을 모으는 것 또한 한모토의 일이었다. 한모토는 당시의 유행, 그리고 팀원들의 성향과 역량을 고려하여 어떤 내용의 판화를 얼마만큼 제작할지 결정했다.

예를 들어 쓰타야 주자부로(, 1750-1797)라는 한모토는 18세기 말 에도 대중문화의 중심적인 존재였다. 뒤에 나오겠지만 미인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麿, 1753-1806)와, 가부키 배우를 그린 판화로 유명한 수수께끼의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 생몰년미상)가 주자부로에게 발탁되어 활동했다.

우키요에 목판화를 직접 만드는 이들을 ‘우키요에시()’라고 한다. ‘우키요에시’는 다시 ‘에시()’와 ‘호리시()’, ‘스리시()’로 나뉜다. 에시는 밑그림을 그렸고, 호리시는 에시가 그린 밑그림을 목판에 새겼다. 이렇게 만든 목판에 스리시가 물감을 얹어 찍어냈다.

가쓰카와 슌잔의 판화 시리즈 『당대 여인의 열 가지 미덕』을 위한 밑그림, 1782-98년

먼저 에시가 단색으로 밑그림을 그린다. 이 밑그림을 ‘한시타에()’라고 한다. 한시타에를 호리시가 받아서는 뒤집어서, 즉 좌우를 바꿔서 판목에 풀로 붙이고는 손으로 종이를 슬슬 벗겨낸다. 그러면 밑그림이 아주 얇게 판에 들러붙은 모양새가 되어 밑그림의 윤곽선이 또렷하게 판목 위에 드러난다. 이를 호리시가 칼로 판다. 이처럼 밑그림의 윤곽선을 파내면(정확히 말하자면 밑그림의 윤곽선만 남기고 판의 나머지 부분을 파내면), 이게 앞으로 이어질 작업 공정의 기준판이 된다. 이 판을 ‘오모한()’이라고 한다. 앞서 에시가 그렸던 밑그림은 이 과정에서 벗겨져 사라진다. 스리시가 오모한을 열 몇 장 정도 종이에 찍어내는데, 이를 ‘교고즈리()’라고 한다. 다시 에시의 차례. 에시는 이 ‘교고즈리’를 놓고 세부적인 부분을 더 그려 넣어서 전체적으로 다듬어서 완성한다. 밑그림 단계가 비로소 끝난다.

에시가 밑그림을 어떤 색으로 찍어낼지 정한다. 물론 에시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건 아니고, 호리시, 스리시와 의견을 주고받아 결정한다. 이렇게 작업 공정이 잡히면, 호리시는 판목들을 파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목판화에서 길고 가느다란 선을 찍어 내려면 그 선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파내야 한다. 호리시에게는 적절한 힘은 물론 엄청난 끈기와 주의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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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마로의 판화,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 1792-93년경, 오반니시키에, 뉴욕 공립도서관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의 판목 중 하나. 오늘날의 복각판()

판목은 칼로 파내기 쉬우면서도 여러 장의 판화를 찍어낼 수 있도록 단단해야 했다. 이즈() 반도의 벚나무(산벚나무)가 이런 조건에 맞아 널리 쓰였다. 간단히 생각하면 한 점의 목판화 안에 등장하는 색의 수만큼 판목이 필요하겠지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종종 판목의 양면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판화를 10색으로 찍는다 치면 판목은 다섯 개면 충분했다. 게다가 하나의 판목으로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색을 찍기도 하고, 한 번 찍은 판목을 뒤에 다시 찍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판목의 수를 줄였다. 여러 개의 색판을 정확하게 겹쳐 찍어내기 위해 판목마다 일정한 위치에 눈금을 새겼는데, 이 눈금을 ‘겐토()’라고 한다. 이렇게 만든 판목들을 미리 정한 순서에 따라, 스리시가 겐토에 맞춰 종이에 대고 찍어냈다. 완성된 판화는 한모토가 가져다가 오늘날의 서점과 비슷한 ‘에조시야()’에서 판매했다.

우키요에 판화를 만들 때는 이처럼 호리시, 스리시가 함께 작업했지만 흔히 에시의 이름만 언급된다. 기껏 한모토의 이름을 함께 언급하는 정도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했던 스즈키 하루노부의 경우에도, 하루노부는 에시의 역할을 했을 뿐, 오늘날 하루노부의 작품으로 알려진 판화는 세키네 가에이()라는 호리시, 오가와 핫초(調)라는 스리시와 함께 만든 것이다. 호리시와 스리시의 존재는 뒤로 물러나고 에시의 존재만 부각되는 이유는, 아마도 우키요에 팀원들 중에서도 에시의 개성은 대체하기가 가장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호리시와 스리시의 역량 또한 목판화 제작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대개 특정 에시와 함께 작업하는 호리시와 스리시는 정해져 있었고, 한모토까지 포함된 목판화 제작팀은 작업을 연달아 함께 하곤 했다.

다색 판화의 기법

우타가와 히로시게, 『후지산 36경』중 [다나바타() 축제], 1852년, 오반니시키에 화면 속 하늘의 아래쪽은 밝지만 위쪽 가장자리로 갈수록 진한 남색이 된다. 이처럼 하나의 면 안에서 두 가지 이상의 색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연출한 기법을 ‘후키보카시’라고 한다.

우키요에 목판화의 형식이 발전하면서 다채로운 기법이 등장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기법이 ‘보카시(ぼかし)’이다. 한국어로는 ‘바림’이라고 옮길 수도 있지만, ‘그라데이션(gradation)’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목판화에서 보카시는 하나의 판면 안에서 하나의 색이 다른 색으로 부드럽게 바뀌어 가도록 하는 기법이다. ‘이타보카시(ぼかし)’와 ‘후키보카시(きぼかし)’가 있다. 판면을 약간 경사지게 만들어서는 경사진 쪽에 물감이 묻지 않도록 해서 바림 효과를 내는 방식이 ‘이타보카시’이다. 이보다 훨씬 널리 쓰였고 효과도 뚜렷한 기법이 ‘후키보카시(きぼかし)’이다. 판목에 부분적으로 물을 묻히고는 그 위에 물감을 살짝 칠하고 종이를 얹어 찍어내는 기법이다.

종이에 올록볼록한 느낌을 주는 ‘가라즈리()’라는 기법도 있다. ‘엠보싱 화장지’의 표면처럼 판화의 흰 여백에 올록볼록 갖가지 무늬를 넣었는데, 무늬를 새기기만 하고 색을 칠하지 않은 목판 위에 종이를 놓고 문질러서 깔끔하면서도 풍성한 효과를 냈다. 주로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한 판화에서 여인이 입은 옷이나, 강이나 바다의 물결을 묘사하는데 사용했다.

스즈키 하루노부, [다마가와 강에서 빨래 하는 여인], 1767년, 주반니시키에, 클래런스 버킹엄 콜렉션 여인이 입은 옷과 들고 있는 빨랫감에 올록볼록하게 ‘가라즈리’가 들어가 있다.

또, ‘기라즈리()’라고 해서, 말 그대로 ‘운모()’ 가루를 완성된 판화의 표면에 뿌려서 화려한 광택을 부여하는 기법도 있었다. 가부키 배우의 초상을 판화로 만든 ‘야쿠샤에()’나 남녀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춘화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우키요에 판화의 가격은 19세기에 낱장 판화를 살 경우, 대다수 조닌이 한 끼 식사로 삼았던 국수 한 그릇과 가격이 비슷했다. 하지만 작품의 크기와 질에 따라 가격은 다양했다. ‘가라즈리’나 ‘기라즈리’를 구사한 고급 판화는 당연히 값이 비쌌고 앞서 본 ‘에고요미’처럼, 돈 많은 상인이나 호사가들은 값을 따지지 않고 질 좋은 종이와 귀한 안료를 사용한 판화를 주문하곤 했다.

우키요에의 인장과 검열

에도를 지배했던 도쿠가와 바쿠후는 당시의 가장 일반적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우키요에 출판에 대해 시시콜콜히 개입했다. 사회 전체에 사치를 금하는 영을 내렸던 바쿠후는 우키요에 판화에 대해서도 너무 화려한 색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값비싼 판화를 만들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하지만 우키요에 화가들과 출판업자들은 당국과 줄다리기를 하며 고급 판화를 찍어내곤 했다.

정치적 비판에 극단적으로 예민했던 도쿠가와 바쿠후는 판화의 내용에도 간섭했다. 일단 바쿠후에 대한 비판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도쿠가와 가문의 사람은 물론, 앞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도 그려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춘화()도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었다.

출판물은 판목을 파기 전에 우선 밑그림을 당시의 행정, 사법 관료였던 마치부교()에게 제출해서 허가를 받고 그 허가인(), 즉 ‘아라타메인()’을 판에 함께 새겨서 찍어 내도록 했다. 아라타메인은 시대에 따라 도장의 형태가 달랐기에 오늘날에는 우키요에 판화의 제작연대를 고증하는 열쇠가 된다. 판화의 화면 구석에는 아라타메인과 한모토의 인장, 그리고 우키요에 에시의 서명이 줄줄이 자리를 잡았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나니와야 찻집의 오키타], 1793년, 오반니시키에, 도쿄 국립박물관 여인이 서 있는 여백 부분에 ‘운모’ 가루를 칠한 ‘기라즈리’ 기법이 사용되었다.
여인의 등 쪽, 맨 위부터 원 안에 ‘극()’자가 들어간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1790년대의 ‘아라타메인’이다. 그 밑의 담쟁이(쓰타) 모양은 이 판화의 제작자인 쓰타야 주자부로의 인장이다. 그 바로 밑에 ‘우타마로 그림(麿)’이라고 새겨져 있다.

애초에 제재를 결정할 때부터 출판업자, 즉 한모토는 검열을 의식했다. 하지만 출판업자와 우키요에 판화가들이 금령을 어기다가 철퇴를 맞기도 했다. 앞서도 언급한 출판업자 쓰타야 주자부로와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는 도쿠가와 바쿠후가 금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을 판화에 담았다가, 주자부로는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했고 우타마로는 50일 동안 수갑을 차고 지내도록 하는 벌을 받았다.

 

 
글  이연식 | 미술평론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동서고금의 미술에 대해 저술, 번역, 강연을 하고 있다.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아트 파탈』, 『괴물이 된 그림』 등을 썼고 『무서운 그림』 등을 번역했다.
  • Mar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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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 [탑원도소회지도], 지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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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이는 그림은 1912년 정월 초하루 밤에 오세창(, 1864-1953)의 탑원()에 모여 '도소()'라는 술을 마시며 지난 한 해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장수를 기원하던 문인묵객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것이다. 탑원은 종로3가역 부근 돈의동()에 살았던 오세창이 집에서 탑골공원의 원각사탑()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으로, 이 탑원에 오세창과 안중식 외에 6명이 더 모였다.

특정한 인물과 시간, 장소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기록성과 기념성이 강한 그림이다. 안중식의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진경화풍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이 그림에는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초하루 밤의 상서롭고 흥겨운 술자리를 강조하기 위해 멀리 보이는 원각사탑과 주변의 울창한 숲을 모두 밤안개와 어둠 속에 뿌옇게 흐려 놓았다. 주흥()이 도도한 누각은 마치 물안개에 잠긴 호수 위에 떠가는 배처럼 신비롭다. 마치 심사정에 의해 정립된 조선남종화의 영향을 보는 듯 한데, 등장인물들 역시 조선의 의복이 아닌 중국식 의복을 입고 있다. 더 이상 진경화풍의 근본이념인 조선중화주의가 시대이념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안중식의 진경화풍에 대한 변화된 이해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안중식의 제자 무호() 이한복(, 1897-1940)은 1918년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서 공부한 유학파이다. 그가 1923년 서울로 돌아온 후 30살 되던 1926년 2월 외금강의 명승인 만물상()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을 살펴보자.

이한복, [금강산도], 견본수묵, 간송미술관 소장

일본 화풍과 서양 풍경화 구도를 토대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리던 이한복의 20대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우선,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표현하던 정선의 그림과 달리 이한복은 실제 눈에 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화폭에 그렸다. 그리고 짙은 먹과 묽은 먹으로 풍경의 차이를 두어 화면의 깊이감을 표현하는 전통 화법을 구사했지만, 수많은 화강암 봉우리들은 모두 뼈처럼 단단한 기운 없이 일률적이기만 할 뿐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다. 18세기의 진경산수화와 판연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20세기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이처럼 서양화의 구도와 일본화의 필묵법에 영향을 받은 진경산수화는 다음 세대의 산수화로도 일정 부분 계승되었다.

시대를 넘어선 진경의 정신

심산() 노수현(, 1899-1978)은 청전() 이상범()과 함께 안중식 문하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던 인물인데, 그의 그림에도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살아 있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1935년 여름 노수현이 고향 황해도 부근의 장수산()에 있는 천불봉()을 그린 작품이다.

노수현, [천불봉], 지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재령() 평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멸악() 산맥이 재령강 앞에서 갑자기 치솟으며 기암절벽을 이룬 장수산은 ‘황해()의 금강()’으로 불리는 명승이다. 특히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틈새가 발달한 흰색의 규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 전체가 기암괴석의 천태만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참나무와 소나무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농가 뒤편으로 웅장하게 솟은 천불봉의 자태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촉촉하고 맑은 묵을 통해 수많은 가늘고 섬세한 붓질로 결이 많은 규암의 질감을 묘사한 후 짙은 먹으로 군데군데 적절히 심을 박아 암벽의 웅장한 높이와 거대한 질량감을 표현했다.

작가는 이 그림에서 손에 익은 전통 화법보다 눈에 비친 그대로의 풍경을 강조했다. 그 결과 화법에 의해 풍경의 표정과 느낌이 바뀌었던 전통적 진경산수화풍과 달리 실제 풍경을 눈앞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실제의 풍경 위에 단순히 전통 화법을 얹어 놓거나 지나치게 필묵을 실경에 종속시켰던 이전과 달리, 실경과 필묵을 적절히 융합시켜 풍경의 멋과 필묵의 맛을 함께 살렸다. 스승으로부터 도제식으로 익힌 조선 말기의 화보풍 전통회화와 사생에 기반한 현대회화를 융합시켜 전통적인 정형산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노수현의 30대 시절 작품이다. 노수현은 1948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현대 한국 화단의 초석을 마련했기에, 진경산수화의 전통 역시 현대 한국 화단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우리 산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화는 조선후기 특정한 시기에 출현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의 예술적 조형성이 다르게 나타났던 것은 그 진경의 정신을 이해하는 그 시대의 분위기와 그림을 그린 작가의 차이에 기인한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혼란한 지금 외래문화와 전통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이 사회에 정착하려면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때 외래문화의 짝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안목과 자긍심을 위해 진경산수화는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 Mar 0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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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1745-1806년 즈음). 우리는 그의 그림을 대부분 풍속화로 알고 있다. 물론 김홍도는 풍속화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고, 그의 그림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고 따뜻하게 해 준다. 그의 스승 강세황()의 말처럼 여염 백성들의 일상 풍속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을 본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니 그는 정말 ‘고금()의 화가 중에 없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단원이 풍속화에서 이룬 업적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인 홍석주()가 김홍도의 산수화를 보고 ‘김홍도를 풍속화 작가로만 아는 것은 그를 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단원이 풍속화의 대가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회화세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또한 현재 전하는 김홍도의 그림 중 상당수는 풍속화와 함께 사대부들의 취향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꽃과 새 그림) 등이다. 그중에서도 작품의 양에서는 산수화가 가장 많다. 이제 풍속화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천재 화가 김홍도의 진경산수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국왕 정조와 화원 김홍도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났던’ 소년 김홍도는 21살 때 여러 화원()들을 대표하여 궁중의 행사 그림을 그릴만큼 탁월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았다. 29살의 나이로 국왕 영조()와 왕세손()의 어진(; 국왕의 초상화)을 그렸던 김홍도는 3년 후 정조가 즉위하며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김홍도, [규장각도], 1776년,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미술 작품 보러가기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30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때부터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에게 주관하게 하였다. - 정조, 『홍재전서』

왕세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화원 김홍도를 국왕 정조는 즉위 이후 본격적으로 등용하여 화원의 공식 임무였던 국가적 행사 관련 그림을 주관하게 했다. 그러한 정조의 어명을 받고 그린 규장각 그림이 정조 재위 시절 김홍도의 첫 작품이다. 창덕궁 후원에 있던 규장각을 그린 이 진경산수화에서는 서울의 진산 백악산과 북한산 및 삼각산이 표현되어 있는데,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정조가 향후 국정을 운영해 나갈 때 하나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규장각이었던 만큼 정조의 깊은 애정과 단원의 탁월한 솜씨가 결합된 빼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어명()을 받고 떠난 금강산 여행

김홍도는 40살이 되던 1784년 경북 안동의 안기()라는 지역의 찰방(;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직)에 부임한다. 화원이라는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외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그림 능력과 이를 신뢰한 국왕 정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믿음은 한결같았다. 1788년 김홍도는 천하제일 명산 금강산을 사생해 오라는 어명을 받는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금강산을 직접 가볼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믿는 화원 김홍도에게 직접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김홍도는 선배 화원인 복헌() 김응환()과 함께 동해안 일대 관동() 10군의 명승지를 직접 발로 밟으며 정성을 다해 [금강산도]를 그려 바친다. 현재 전하지 않지만 당시 김홍도가 정조에게 바친 [금강산도]는 수십 길이 넘는 두루마리 그림으로 화려한 채색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국왕에게 바친 이 어람용 진경산수화 외에 현재 김홍도의 당시 금강산 여행을 짐작하게 하는 진경산수화 여러 점이 남아 있다. 그 중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몇 점을 살펴보자.

김홍도, [묘길상], 지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미술 작품 보러가기

묘길상()은 금강산 내금강 지역에 있는 만폭동() 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에 새긴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마하연에서 동쪽으로 시내를 타고 안문재를 향해 약 3km 정도 가면 만나게 된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 넘어지어. 외나무 썩은 다리, 불정대 올라하니.’라고 읊었던 그 묘길상 그림이다.

설법인(: 법을 설할 때 짓는 손 모양)을 지은 두 손의 표현이 실제 조각 보다 더 자연스럽게 표현되었고,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 있는 발 표현 역시 매우 사실적이다.

석등 옆에 서서 불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묘길상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묘길상 주변의 소슬한 나무 표현은 단원 특유의 표현법인데, 부드럽고 온화한 불상의 미소와 잘 어울린다.

단원 진경산수화의 사실성

김홍도는 나라의 녹봉을 받는 화원이었다. 화원은 어진이나 왕실 및 국가적 행사를 그리는 일이 주된 업무였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표현에 충실한 그림을 그리는 성향이 강했다. 금강산 사생 여행을 통해 그려낸 진경산수화에서는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앞 세대의 사대부 화가 정선과 비교해 보면, 화원 김홍도의 특징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금강산 외금강에 있는 구룡폭포를 그린 겸재와 단원의 진경산수화를 비교해 보자.

금강산의 주 봉우리인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주변의 여러 골짜기 물들을 함께 모아 흐르다가 120여 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 풍경이다. 금강산에 있는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해서 구룡폭포를 보지 않고는 금강산을 보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절경 중의 절경이다.

겸재와 단원 모두 폭포가 선사하는 무한한 감동을 그림으로 펼쳐 보였는데, 결과는 이처럼 사뭇 다르다. 사대부 화가였던 정선은 도끼날로 쪼개는 필법을 대담하게 구사하면서도 가능한 붓질을 줄이며 폭포와 연못을 이루는 절벽의 표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순화했다. 선택과 집중의 효과가 탁월하다. 반면 김홍도는 폭포를 만드는 거대한 절벽의 요철과 굴곡은 물론, 곳곳의 나무들과 세세한 모습까지 매우 정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했다. 마치 눈에 보이는 모든 경물들을 가능한 한 하나의 화면 안에 가득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폭포 물줄기가 시작되는 가장 윗부분에서는 두 그림의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정선은 폭포의 장쾌하고 거침없는 강인함을 위해 폭포 너머의 풍경을 과감하게 생략한 반면 김홍도는 폭포 너머의 배경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그려내어 극적인 긴장감이 다소 줄어드는 아쉬움이 있다.

노을로 지는 진경산수화

정선과 김홍도의 진경산수화가 이와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작가의 기량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 분위기의 변화에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스스로 진경 화풍을 창안했던 사대부 화가 정선의 18세기 전반과 무르익은 진경 화풍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던 화원 김홍도의 18세기 후반. 단원은 탁월한 기량으로 천부적인 회화적 성취를 이룩하며 진경 화풍의 찬란한 대미를 장식했다.

아래 작품은 단양팔경()으로 불리는 곳 중 하나인 옥순봉() 그림이다. 단원은 48살이던 1792년 부근의 연풍현감에 부임하여 4년 동안 고을살이를 하는 동안 옥순봉을 비롯한 부근의 명승지들을 빠짐없이 둘러보았다. 그래서 단양팔경을 그린 단원의 작품들 다수가 전하는데, 이 그림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후반인 60세 전후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도, <옥순봉>, 지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미술 작품 보러가기

옥순봉을 주제로 부각하기 위해 주변 산의 높낮이를 조정하고, 그 이외의 풍경들은 과감하게 안개로 가렸다. 진경 화법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보여주는 이러한 표현들은 김홍도의 후반 생애 작품들에서 주로 확인된다. 풍경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화원적 기질에서 벗어나 이제 화면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무와 숲을 표현할 때는 자신만의 기법을 잃지 않고 있는데, 겸재 진경산수화법의 토대 위에 자신의 개성을 가미시켜 조선 산천의 기세와 정취를 모두 담아냈다. 진정한 단원의 대가() 다운 모습이다. 갓 쓴 선비가 나귀를 타고 동자 하나를 딸린 채 강변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노년의 단원을 보는 듯하다.

단원에 의해 화려한 노을로 빛났던 진경산수화는 긴 어둠의 그림자를 함께 드리운 채 서서히 저물어갔다. 천재 화원 김홍도의 마지막 삶과 함께 점차 빛을 잃어간 진경산수화는 조선 말기와 일제시기에 또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참고문헌
『간송문화 - 진경산수화』, 간송미술관, 2014
오주석, 2004 『단원 김홍도』 열화당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437 용문중학교 미술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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