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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용어사전(ㄱ)

  

參考文獻 

• 세계 미술 대사전 한국미술연감사 1986
• 디자인 대사전 도서출판 숭례문 1994
• 미술의 역사 H.W. 잰슨 삼성출판사 1982
• 세계미술 용어사전 중앙일보사 1989
• 동아 세계 대 백과사전 동아출판사 1990
• 미술사전 한국미술연감사 1989


가독성 可讀性  타이포그래피의 기능적 측면의 하나로, 문자가 잘 읽혀지는 정도 혹은 문장의 내용이 쉽게 전달되는 정도를 말한다.

가람 如藍 sangharama  불교사찰을 말하거나 단순히 사찰 내의 전당을 일컬는 용어로 원래는 승단이 거주하는 원림이란 뜻. 인도어의 한역인 승가람마(借師藍摩)를 줄여서 가람 이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수행하는 승려가 모여 수행(修行) ·숙박하는 원림(園林)을 말하였는데, 나중에는 가람에 7가지 건축물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것을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고 한다. 7당이란, 중국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금당(金堂) ·강당 ·탑 ·식당 ·종루(鐘樓) ·경장(經藏) ·승방(僧房)을 다 갖춘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칠당의 명칭과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른데 보통 남향(南向)으로 세웠다.

간다라 미술 null 파키스탄 북부인 페샤와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에서 1~5세기에 번성한 미술을 말한다. 페샤와르, 스와트, 탁실라 및 아프가니스탄의 일부까지 포함되는 간다라 지역의 미술은 서방 문화, 특히 '로마'와 '파르티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그 이전 박트리아에 있던 헬레니즘 미술이 간다라 미술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불교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간다라 미술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 인도에서는 BC 3세기 이후부터 생겨났으나, 불상은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때까지 불타(佛陀)는 오직 보리수[菩提樹] ·스투파 ·법륜(法輪) ·보좌(寶座) 등 상징적으로만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 후 이것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간다라불상이라고 한다. 간다라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또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그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즉, 간다라 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이것의 역사적 근거로는, 이 지방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침입(BC 327~BC 326) 이래 BC 2세기부터 AD 1세기에 걸쳐서 그리스인 ·샤카족(族) ·파르티아족 ·대월지족(大月氏族)이 잇따라 진출하여 그리스계의 문화가 이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간다라 조각 중 제우스 ·아테네 ·헤라클레스 ·아틀라스, 그 밖에 그리스적 주제(主題)가 담긴 상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간다라 조각의 주제로서 중요한 것은 불전도(佛傳圖)와 불타상이다. 보살도 많지만 특정한 보살은 관음(觀音)과 미륵(彌勒) 뿐이다. 조각은 거의가 부조(浮彫)이고 대개는 스투파 기단(基壇)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주재료는 청흑색의 각섬편암(角閃片岩)이다. 그리고 석회상(石灰像)은 간다라불상의 말기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간다라계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간다라 조각은 대월지족이 세운 쿠샨왕조(40~ 245년경)의, 특히 카니슈카왕(2세기 중엽) 때에 가장 활기를 띠었다.

갈필 渴筆  먹물의 사용을 억제하여 마른 듯한 상내츼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의 기법. 먹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습필, 윤필과는 다르며, 고필, 찰필 이라고도 한다. 먹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한획에 함께 나타나서 거친 효과를 내기 때문에 초속적 일기를표현하는데 주로 사용된다.

감필묘 減筆描  붓질을 많이 하지 않고 최소한의 필선으로 자유분방하고 빠른 속도로 그리는 기법. 원래는 생필(省筆)·약필(略筆)이라 하여 글자의 자획을 줄여서 쓰는 서예의 기법이었으나, 당말오대(庸末五代)때부터 회화기법으로 응용되기 시작하여 남송(南宋)의 양해(梁惜)에 의해 그 전통이 확립되었다. 대상의 본질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므로 간략화된 형태로 나타나며 일품화가나 선승화가들이 사의적인 인물화를 그릴 때 애용하였다.

감정이입 感情移入  지각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투입시켜 객관화하는 작용. 그릴 때 대상과 감정은 연상이나 유추에 의해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통일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지각의 대상에 속하는 것으로서 체험되는 감정 내용은 이 작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된다. 따라서 감정이입은 인간 생활 일반에서 널리 볼 수 있으며 자아 이해의 기초로도 되는 것이나, 이것이 완전히 수행되는 것은 미의식에 있어서라고 하여 이것을 미의식의 중심에 앉힌 것인 립스나 폴켈트의 감정이입의 미학이다.

강세황 姜世晃 (1712~1791) 
조선의 문인·화가·평론가. 호 첨재.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있을 정도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시·서·화의 삼절로 불리 는,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 밖에도 진경 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첨재화보><벽오청서도><표현연화첩><송도기행첩><삼청도><난죽도〉등이 있다.

개자원화전 芥子園畵傳 중국 청초(淸初)에 간행된 화보. [개자원화보]라고도 한다. 원래는 3집이었으나 이후4위탁본으로 간행되었다. 1집은〈산수수석보山水水石譜> 5권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1679년 왕개王薦가 명말(明末)의 화가 이유방이 옛 명희들올 모아 만들었던 <산수화보>를 증보 편집한 것이다. 개자원이라는 이름은 산수화보를 소장하고 있던 심심우(沈心友)의 장인 이어(李漁)의 별장 이름에서 따은 것이다.

거리미술 street art  야외 조각전시, 낙서, 벽화, 거리 연극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용어. 모두 공적으로 개방된 공간에서 공개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거리 미술이란 용어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넓게는 야외전시, 거리 퍼포먼스, 해프닝, 포스터, 낙서, 벽화 등 개방된 공간에서 예술가들이 행하는 예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1930년대 멕시코의 벽화주의를 선두로 1970년대에 개념미술 작가들이나 플럭서스 그룹이 거리에서 행한 퍼포먼스, 거리의 게시판이나 전광판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정치적·사회적 선전을 목적으로 한 정치예술, 1980년대의 그라피티 아트(낙서미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거리미술 개념은 마야코프스키가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하자."고 선동하여 작가들을 고무하던 러시아 혁명 이후의 대중을 위한 구경거리와 선전미술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 확산되기 시작한 공공 벽화 제작을 계기로 거리미술이 확고하게 정착되었는데, 당시의 과도기적인 정치사회 사상에서 비롯된 새로운 사회환경 개선책으로 벽화 제작이 성행하였다. 도시의 게시판에 작품을 설치한 작가들로는 코주스(Joseph Kosuth), 뷔렝(Daniel Buren), 콜버슨(Lan Colverson), 마시(Denis Masi) 등이 있다.

고분벽화 古墳壁畵  고대 무덤의 내부벽에 그려진 그림. 왕과 귀족등의 지배층 무덤에 그려졌으며,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를 위해 제작 되었다. 주벽에는 현실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 천장에는 하늘세계와 관련된 내용을 그려넣어 무덤 안을 하나의 축소된 우주로 꾸몄다. 한대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4~7세기 중엽 고구려에서 가장 성행했다. 고대 회화의 양식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비롯한 사상, 종교, 각종 생활 풍속 등을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견적법 見積法  목조나 석조를 제작할 때 미리 제작한 원형과 비교해 보면서 실재의 일을 진척시키는 방법이다. 별모양자에 의한 콤파스 재기나 표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는 바둑판 재기 등의 방법에 의해, 기술적으로는 가장 손쉬우나 가장 감각이 존중되는 방법이다.

고유색 固有色  평소 태양광선 아래서 볼 수 있는 물체 고유의 색이다. 개념적으로 그 물체에 고유하다고 믿어지는 색을 의미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물에는 일정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관선의 변화와 보색의 작용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색채현상을 인정하여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였다. 특수한 조명 상태나 일기, 시간 등에 의한 특수한 빛의 반영을 받아서 생기는 색, 혹은 한 미술가의 기호에 의해 변형된 색과는 구별된다.

고전주의 高典主義  classicism 일반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인 및 로마인이 이룩한 바와 같은 단정, 간소, 전아한 예술양식을 모범으로 삼는 예술의 경향을 말한다. [서양미술사 참조]

고화품록 古畵品錄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南齊의 화가 사혁謝赫 (500~535년경 활동)이 저술한 화가품평서1권. 본래는 화품(畵品)이라고 불렀다. 중국에 현존하는 화론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화론이다. 육법은 그림을 그릴 때 꼭 있어야 할 6가지의 창작 원칙으로, 사혁이 이를 기준으로 그림외 우열을 나눈 이래 회화 평론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육법을 보면 첫째가 기운생동(氣韻生動)이고, 둘째가 골법용필(骨法用筆)이며, 셋째가 응물상형(應物象形)이다. 넷째는 수류부채(隨類賦彩)이고, 다섯째는 경영위치(經營位置)이며, 여섯째는 전이모사(傳移莫寫)를 주장하고 있다.

공간예술 空間藝術  일정한 공간을 구성함으로서 형상화되는 예술을 가리킨다. 음악이나 문학 등과 같은 시간예술에 대비된다. 회화나 평면장식 등의 이차원적 예술과 조각, 건축 등의 삼차원적 예술을 총칭한다. 흔히 조형 예술이라고 할 경우, 일반적으로 공간 예술을 의미한다. 공간 예술의 특색은 그 작품이 물질적 재료를 매개로 해서 실재적 공간성을 지니고, 제작자로 부터 독립된 객관적이고 항상적인 완성품적 존재라는 데 있다.

공간주의 空間主義  이탈리아의 화가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에 의해 제창되었던 예술 운동 제2차 세계대전 후 밀라노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공간주의 선언〉을 동반하여 예술표현 영역의 확대를 지향했다. 이 운동은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탈피하고 세라믹(도자기), 콘크리트, 인광 물질과 같은 공업사회의 재료와 기술수단을 취급하며 특히 4차원적인 공간을 표현하려 했다.

공상화 空想畵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또는 실제로 체험하지 않은 사상(事象) 등 비현실적인 것올 자유롭게 상상하여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공상화는 아동화(兒童書)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에는 동화나 미지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 등을 상상해서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공예 工藝  실용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겸해서 가진 조형품의 총칭. 공예는 생활에 유용한 물건올 제조하는 공업과 미롤 창조하는 예술의 두 영역이 중첩되는 곳에서 성립된다. 근대의 예술 관념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공예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아. 예술과 공업은 미분화된 채 통일되었으므로 모든 조형품이 공예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공예가 새로 인식되게 된 것은 19세기로, 특히 영국의 미술과 공예운동에 의해서였다.

과슈 gouache  물에 녹는 아라비아 고무를 섞은 불투명한 그림물감 또는 이것을 써서 그린 그림. 물에 풀어 그리므로 수채화의 일종으로 보아도 좋다. 종이나 양피지뿐만 아니라 상아에도 그려진다. 색조는 선명하나, 유화와 같은 윤기는 없으며, 가라앉은 부드러운 맛을 낸다. 혼색을 하면 선명도를 잃기 때문에 주로 단색으로 사용하며, 색과색을 겹쳐서 복잡한 색감이나 마티에르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래커를 칠하거나, 씻어서 깨끗이 할 수 없으며, 또 건조된 공기 속에서는 벗겨지기 쉬운 약점도 있다.

과정미술 過程美術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그 작품의 주제로 삼는 미술. 이 개념은 이미 1950년대부터 제시되어 왔는데 그 예로 액션 페인팅의 행위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극히 단순한 테크닉이 채용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최종의 작품을 보고 그것이 만들어진 절차를 마음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는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으로 벽에 엽총을 발사한 다음 그 결과를 사진찍고 그 사진을 확대하여 다시 엽총을 쏘고 그 결과를 또 사진으로 찍는다는 식이다. 토머스 알브라이트는 과정미술을 '변화의 행위, 그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작가 자신은 창조적인 과정의 구현자로 신체미술에서 처럼 미술작품 자체가 되기도 하며 이런 점에서 해프닝, 퍼포먼스, 이벤트의 개념과도 연관성이 있다.

과학적 인상주의 Scientific Impressionism  신인상주의에 대한 또 다른 명칭. 종래의 인상주의를 더욱 이론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이와 상대적으으로 전통적 인상주의를 낭만적 인상주의Romantic Impressionism라고 부르고 있다.

공판 孔版  인쇄용지에 겹친 원판의 형상 부분을 떼어 두어, 거기에 물감을 직접 지면에 칠하는 판식이다. 원판에는 종이, 비단, 금속박판 등이 사용된다. 스텐실판, 등사판, 실크·스크린 등은 공판에 포함된다.

광선주의 光線主義  인상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 부터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추상 회화 운동. 인상주의의 빛과 색채의 관계를 발전시킨 방사되는 광선 가운데서의 사물의 형태와 색채의 리듬을 파악하는 방법과 미래주의에서 강조한 회화 속에 일종의 사차원적인 시간을 도입 하였으며, 순수하게 색과 모양만의 세계 즉, 추상회화의 영역으로 몰입해 갔다.

구도 構圖  미적 효과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부분을 통일성 있게 전체로 조립하는 것. (라틴어의 조립하다, 구성하다에서 유래된 말로서)주로 회화, 판화, 부조와 같은 평면적 조형에 있어서 형식적 구성을 의미한다. 조각이나 건축에 관해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구도에는 선, 색채, 필촉 등의 순수 조형 요소가 관여되는데, 전통적 회화에서는 묘사대상의 형태가 중요하며 크기, 볼륨, 면을 달리하는 제 대상이 한정된 회화 공간 내에 조직적으로 배치·구성되는 그 방식과 관련이 있다. 단일한 대상이라도 그려져야 하는 공간, 바탕 혹은 여백과의 관련에서 구도가 문제된다. 구도를 잡을 경우, 기본적으로 점태, 선태, 면태 및 그들의 복합과 ·전 면적과의 관계가 항상 고려되지 않으면 안되며 또 이들 점 ·선 ·면은 색깔을 동시에 그 속성으로서 취급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리듬, 비례, 균형, 조화, 통일, 변화, 강조 등과 같은 미적 질서의 법칙에 따라 배치되어야 한다.

구륵진채 銶勒沒彩 
동양화에서 형태의 윤곽을 먹선으로 먼저 그리고 그 안쪽을 채색하는 기법을 말하며 준말로 구륵 이라고도 한다. 당대 이후 윤곽선을 나타내지 않는 몰골(沒骨)이 등장하자 이와 구분하기 위해 이전까지 사용했던 방법을 구륵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번에 써 내는 것을 '구' 라하고, 겹쳐서 그리는 것을 '륵'이라 한다. 보통 선으로 사물의 윤곽을 묘사한 후 칠하는 것을 가리키며 '쌍구雙銶' 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정밀하고 세밀한 화조화(花鳥)를 그릴 때 사용된다.

구상화 具象畵  일반적으로 자연 풍경이나 인물, 정물을 본 그대로 그리는 사실화를 지칭한다. 구상화의 기본은 자연의 모방이며 현대 이후 형태의 변형과 주관적 색채의 그림도 포함시킨다.

금강전도 金剛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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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 국보 제217호. 지본담채(紙本淡彩) 59×130.7 cm 호암미술관 소장. 금강내산(金剛內山)을 부감형식(俯瞰形式)의 원형구도로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이다. 왼편에는 윤택한 토산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에는 수직준(垂直)으로 정의된 수많은 첨봉(尖峰)의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바위산에 보이는 수직준들은 대개 강하고 활달하며 예리한 데 비해, 토산에 보이는 준법(法)과 미점(米點)들은 습윤하고 부드럽다. 부감법으로 홍문교(虹門橋)로부터 1만 2천 봉을 집결시켜서 그리는 화법은 겸재 이후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것이 겸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본(祖本)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상고할 길이 없다. 《금강전도》에 나타난 필법은 거센 필선으로 중첩(重疊)한 무수한 봉골(峯骨)을 죽죽 그려내린 것으로 금강산과 같은 골산(骨山)에 알맞다. 이 점에서도 겸재의 천재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골법을 써서 중봉(衆峰)을 그리거나 산세를 묘사할 때는, 화면 전면을 꽉 채우거나 중앙으로 몰아 집중적으로 그리는 두 가지의 독특한 구도를 채택한다. 이 점은 중묵암산(重墨岩山)의 화법 때의 구도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지도제작법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힌다.

금속공예 金屬工藝  금속을 주재료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일용품이나 장식품을 만드는 공예. 재료에 따라 귀금속 공예와 보통 금속공예로 나눈다. 금·은 또는 백금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귀금속 공예는 주로 장식품을 만드는 공예이고, 구리나 철을 쓰는 보통 금속공예는 일용품이나 도구, 기계류를 만드는 공예로 금속공예의 주종을 이룬다.

금은니 金銀泥  금이나 은가루를 아교물에 개어 만든 안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흰바탕의 종이 등에서는 효과를 제대로 낼수 없으며 감지(紺紙)와 같이 어두운 바탕에 사용되어 독특한 효과를 낸다. 주로 사경(寫經)과 같은 종교용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일반 서화에도 간혹 쓰여졌다. 은니는 나중에 변질되는 결점이 있다.

김정희 金正喜 (1786~1856. 정조10∼철종7)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 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참판인 김로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로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 고증학의 신봉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인정을 받아 그의 문하생으로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09년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의 소언으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1840년(헌종6년) 9월 27일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제주에서는 대정 교리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9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동안 추사는 지방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가르쳐 주었다.
1848년(헌종 14년) 풀려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들어 도합 11년을 귀양살이로 지샌 셈이다.
59세 때인 1844년 추사의 제주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알려진 것은 '세한도(歲寒圖)' 이다.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추사는 '우연사출란도(偶然寫出蘭圖)' 등 여러 폭의 난초 그림과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등 대여섯 폭의 산수화를 그렸지만 역시 가장 걸작은 겨울 소나무와 빈집을 그린 '세한도(歲寒圖)' 이다. null
이 그림은 문자의 향기 [문자향(文字香)]과 서권의 기 [서권기(書卷氣)]가 넘치고 공자의 말씀인 "추운 겨울을 당한 후에야 송백(松柏)이 다른 나무보다 뒤에 시드는 것을 알게 되니라."를 따서 자기의 불우한 처지를 위로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필선은 마르고 담박, 즉 고담하며 간결한 아름다움이 마치 뜻이 높은 선비인 고사의 인격을 대하는 듯하여 심품이라 할 만하다. 참으로 그의 유배 생활의 참담한 환경을 가장 잘 묘사한 그림 같기도 하다. 넓은 공간, 비쩍 마른 고목, 텅 비어 쓸쓸한 오두막집은 차라리 선(禪)의 지극한 경지이기도 하다. 이 '세한도'는 제주에 귀양 와있는 추사에게 꾸준히 귀중한 책들을 보내 준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에게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답신으로 그려 서울로 부친 그림이다. 오위경을 비롯한 청나라의 명류 16명의 제발(題跋)을 받아 그림에 이어 붙인 것으로 더 유명하다.

김홍도 金弘道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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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화가. 본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 단구(丹丘) · 서호(西湖) · 고면거사(高眠居士) · 취화사(醉畵士)· 첩취옹(輒醉翁)이다.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김홍도는 김응환의 제자로서, 신라 때의 솔거 이후 우리 나라 그림의 전통을 확립한 천재 화가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 畵員)이 된 뒤 1771년(영조 47)에 왕세손(뒤의 正祖)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정조 5)에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畵格)을 높이는 동시에, 그의 훈도 아래 詩文書畵를 익혔기 때문에 성리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몸에 지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성리학을 사상 기반으로 하고 있던 진경시대 문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듯 하다.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
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檀園)'이라 자호하였다.
단원 김홍도는 그 고유색 짙은 조선 독자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탄생하여 문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화가이다. 그의 5대조는 守門將을 지냈고 고조부는 종6품의 벼슬, 증조부가 종4품의 萬戶를 지낸 중인 가문의 출신이다. 타고 난 그림 재주로 말미암아 圖畵署 畵員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7~8세 되던 해에 그의 천재성이 인정되어 사대부 화가 강세황(姜世晃)에게 인정받아 그의 훈도 아래 詩文書畵를 익혔다.
단원은 그림 재주를 하늘로 부터 타고난 것이 었기에 모든 화과(畵科)의 그림에 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 인물, 화조, 사군자, 누각 등을 다 잘하는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었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였다고 한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로437 용문중학교 미술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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